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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隱菴記」의 麗末 全義李氏 스님은 누구인가?

페이지 정보

넓은벌 작성일12-01-09 21:06 조회16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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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廬墓三年하고 廉東亭과 交遊酬唱한 이 훌륭하신 스님은 누구신가요? 무은암기(無隱菴記)의 全文은 다음과 같습니다. 함께 감상해 보시죠!!!


 무은암기(無隱菴記) 

 천태(天台) 숭산사(嵩山寺)의 장로(長老)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가문의 우수한 인재로 태어났다. 그 집안에서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는데도 이를 버리고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조계(曹溪)에서 노닐며 사선(四選)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이것도 다시 버리고서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부처의 정수(精髓)를 곧장 자기의 마음자리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부친이 강요하는 바람에 또 승과(僧科)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천태(天台)의 선발에 뽑혀 상상품(上上品)에 발탁된 뒤에 무량의처(無量義處)의 삼매(三昧)를 증득(證得)하기에 이르렀다.

신축년의 병란을 당해 산림(山林)이 거의 남김없이 소실되자 스님이 부모를 모시고 난을 피하였는데, 마치 집안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 드렸으므로, 부모가 크게 기뻐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듣는 자들 역시 스님의 사람됨에 감복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모가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자 스님이 영구(靈柩)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애통한 마음을 다했는가 하면, 묘소 옆에서 시묘(侍墓)하면서 삼년상을 제대로 마쳤다. 이는 비록 지행(志行)을 갖춘 우리 유자(儒者)라 할지라도 견줄 자가 드문 행동이라고 할 것이니, 스님이 마음속으로 지키고 있는 바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천녕현(川寧縣)은 모친의 가향(家鄕)으로서, 산수의 경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벼농사도 잘 되는 곳이라서 한가히 세월을 보내기에는 적격이었다. 따라서 험준하고 깊은 산속에서 솔잎과 잣을 씹고 안개와 노을을 벗 삼으며 세상과 단절한 채 이웃도 없이 사는 것과는 달랐던 만큼 스님의 거처에 점잖은 진신 선생(搢紳先生)들이 왕래하도록 했어야 마땅했을 텐데, 조금 외진 곳에다 터를 잡는 바람에 사람들이 찾는 일이 또 드물기만 하였으니, 이를 통해서도 스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이 남쪽을 유람하다가 요행히 스님을 만나 수창(酬唱)하면서 날이 가는 줄을 몰랐다. 스님이 사는 곳에는 무은암(無隱菴)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동정이 스님의 인품을 사랑할 뿐만이 아니라 그곳의 매죽(梅竹)과 수석(水石)의 뛰어난 경치를 좋아하게 된 나머지,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고서 나에게 무은암의 기문을 부탁하여 사모하는 뜻을 붙이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암자의 이름을 왜 그렇게 붙였는지 나로서는 그 뜻을 잘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우리 부자(夫子)의 말씀 가운데에 “자네들에게 나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언급이 있는데, 내가 평생토록 힘을 쏟아 오면서도 그러한 경지는 아직도 보지를 못하였다. 지금 스님으로 말하면 이단(異端)에 속한 사람이니, 이것을 가지고 그에게 말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스님의 마음이 보통 승려와는 같지 않아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군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보면, 우리 유자(儒者)로서는 그런 말을 자꾸 들려주어 우리 쪽으로 나아오도록 해야지 이단이라고 해서 배척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 세상에서 뻔뻔스럽게 얼굴을 치켜들고서 자기의 소행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숨기는[隱] 부류에 속한 자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스님만은 가슴이 툭 트여서 어떤 상황에서든 털끝만큼도 가리는 것이 없으니, 무은(無隱)이라는 이름을 그냥 허황되게 붙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내가 한번 헤아려 보건대, 암자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어서 사람이 올 때마다 자기의 폐와 간을 그대로 들여다보게 하듯 하고, 암자 밖에는 산 빛이 밝게 비치고 흐르는 물이 맑기만 하여 티끌 하나 붙지 못할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과 경계가 혼연일체가 되어 당당(堂堂)하고 낙락(落落)한 가운데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에 두루 뻗쳐 있고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 전생, 금생, 내생의 삼생(三生))의 끝까지 통할 것이니, 누가 다시 그 주인공(主人公)을 찾아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병든 지가 오래되었다. 하지만 산수 사이에서 한 번 노닐면서 평소의 회포를 통쾌하게 풀어 보고도 싶은데, 무은암에 가면 나를 하룻밤 자도록 허용해 줄지 모르겠다. 이상의 내용으로 기문을 삼으면 어떨까 싶다.(출전 목은문고 제5권, 고전번역원 번역본)

 無隱菴記

 天台嵩山寺長老。全義李氏之良也。仕族也而棄之。學浮屠游曺溪。首四選矣。又棄之入山中。直探佛髓于心地未竟。其父強之。試僧選。乃選於天台。擢上上品。而無量義處得三昧矣。辛丑兵燹。山林幾無遺。師奉父母逃難。安然如在室中。父母大喜。聞者亦服其爲人矣。不幸父母相繼卽世。師攀呼。廬墓側終三年。雖吾儒有志行者。鮮有其比。師之所守。必有以異於人矣。川寧縣。母氏之家也。山水之勝。秔稌之饒。易於度日。非如崎嶇深邃。啖松柏。栖煙露。絶世而莫與隣。則師之所居。當有搢紳儒雅之往來。然地稍僻。人又罕至。師之心可知矣。幸而東亭南游。會晤酬唱。惟日不足。師之所居則無隱菴也。東亭旣愛其人。又樂其有梅竹水石之勝。至于今不能忘于懷。使予記其菴。以寓思慕之意。予曰。名菴之義。吾蓋未之知也。獨吾夫子有二三子吾無隱之語。吾平生所用力而未見之地也。今師異端也。不足以語此。雖然。師之心旣非常髡矣。旣孝父母矣。旣愛君子矣。則吾儒者當進之又進。不當以異端麾之也。嗚呼。世之靦面目而黶然其所爲者。皆隱之類也。而師洞然無纖毫芥於其間。謂之無隱。名不虛立矣。吾試觀之。菴之中有人焉。人至則如見其肺肝也。菴之外有山而明。有水而淸。所謂纖塵不立之境。則人也境也堂堂落落。橫亘十方。豎窮三際。誰復更覓主人公哉。予病也久。思欲一游山水間。以快平昔之懷。無隱菴倘容吾一宿也不。請以爲記。

댓글목록

休文님의 댓글

profile_image 休文
작성일 12-01-13 14:52

전의이씨 전서공파로 공주목사를 지내신 이구직 할아버님의 친동생이신 의징대선사로 보입니다.

넓은벌님의 댓글

profile_image 넓은벌
작성일 12-01-13 20:52

義澄禪師의 俗名을 알 수 있는지요?
 義澄禪師께서 廉興邦의 부탁으로 기문을 썼다면, 이 記文은 1388년 戊辰年(우왕 14년) 이전의 작품이겠군요. 또한 記文의 辛丑年은 1361년 공민왕 10년으로 홍건적의 난을 일컫는 것 같으며, 典法摠郞公 내외께서는 辛丑年이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음을 이 記文을 통하여 알 수 있겠습니다.
 嵩山寺, 無隱菴은 川寧縣이란 지명으로 보아 驪州에 있는 절 같은데, 현재도 存置하는지, 아니면 廢寺址라도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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