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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염씨의 생애는???

페이지 정보

불곰 작성일11-12-13 12:20 조회316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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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곡성염씨의 생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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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성염씨는 고려조 재상이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의 딸로 태어 나셧다.

 


2. 곡성염씨(고려조 재상 염제신의 딸)는 예안이씨(시조 제하공 諱 翊) 3世 숭정대부 군부사전법사판서공(諱 竦)의 후배(后配)이시다.

 


3. 곡성염씨는 예안이씨 4世 익양공(諱 蕆)과 이판공(諱 韞)의 생모(生母)이시다.

 


4. 고려조 재상이신 염제신의 아들인 염흥방(廉興邦)이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그 일당과 함께 처형될 때

 


① 연좌되어 군부사전법사판서공(諱 竦)께서 참화(慘禍)를 당하실 때, 집안은 적몰(籍沒)되고,

 


② 익양공(諱 蕆) 형제분은 12살의 어린 나이로 산승(山僧)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5. 익양공 실기비명(翼襄公 實記碑銘)에는 디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① 北쪽 鎭地에 있는지 무릇 十年에 어머니가 年老하시고 病이 위독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 奉養하기를 懇請하였으나 王께서 允許하지 아니하니

 


② 壬戌(一四四二)年에 두 번째로 官職에서 물러나기를 願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特別히 兵曹에서 事情을 갖추어 請하였기 때문에 允許된 것이었다.

 


③ 기사(一四四九)年에 都承旨 李世衡등이 王께 아뢰기를 『判中樞 李蕆이 七十四歲에 母親喪事를 當하여 슬퍼함이 程道에 지나치고 거기에 또 痢疾에 걸리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6. 위항(4항) ①, ②, ③으로 미루어 볼 때 <곡성염씨께서는 익양공의 극진한 봉양으로 천수(天壽)를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7. 예안이씨 시조(提學公 諱 翊), 2世(成均館 祭酒公 諱 昪), 3世(軍簿司典法司判書公諱 竦), 4世(翼襄公 諱 蕆, 吏判公 諱 韞)까지 모두 묘소를 실전(失傳)하여 설단(設壇)을 하였다는 것이 족보의 기록입니다.

 


8. 함에도 <충남 천안시(구 천원군) 직산면 남산리 산 37번지에 염제신(廉悌臣) 딸 염씨 부인의 묘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9. 왜 어찌하여, <그 아들인 익양공의 묘소마저 실전된 상태에서 곡성염씨의 묘소만이 유일하게 천안시 직산면에 실존한다는 것입니까???

 


★★★ 이 천안시 직산면의 염씨 부인 묘소는 이제까지 어느 가문에서 수호 보존하여 온 것입니까???

 


10. 그리하여 <익양공의 어머니 곡성염씨(염제신의 딸)는 당대 여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① 멸문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식들을 온전히 지켜내고

 


② 또 자신도 천수를 다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③ 이 얼마나 대단한 여장부가 아니리오.>라는 것은,

★★★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댓글목록

능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능선
작성일 11-12-19 07:11

참고문헌 : 한성판윤 변남용 묘갈
충남 천원군 직산면 남산리 산37번지 유자원에 삼위 합폄한 묘소는 바로 변공 휘 남룡과 그 전 후배위 체백을 모신 곳이니정부인 충주지씨는 정승 득청의 딸의고,정부인  파주염씨는 곡성부원군 충경공 염제신의
딸인데 실전 되었던 공과 정부인 지씨는 단기 4318년 을축 정부인 염씨묘소에 초혼 합장 하였다.

참고문헌 : 염씨아들 변효문 비문 내용중
공의 어머니가(변효문)에게 말하길 사명은 국가의 대사로 임금은 너어게 달려 있으니 힘써 임무를 달성함이 성상을 도움으로서 어려움을 만나면 곧 나는 죽으나 역사에 영원히 남으리니 정에 끌리지 말고 왕사에 충성을 다하여라

불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불곰
작성일 11-12-19 08:27

◆◆◆ 능선님!!! 올려주신 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1. 곡성부원군 충정공 염제신의 딸들 중에서

⑴ 군부판서공(諱 竦)의 후배이신 곡성염씨(익양공의 모친)와 한성판윤 변남용의 후배이신 정부인  파주염씨는 자매지간이 되는 것입니까 ???

⑵ 자매간이라면, <염흥방의 참화시에> 군부판서공(諱 竦)께서는 연죄되시어 참화를 당하시고 집안이 적몰되었다는데,

⑶ 한성판윤 변남용께서도 연좌되시어 참화를 당하셨는지 의문스럽습니다

2. <군부판서공(諱 竦)의 후배이신 곡성염씨(익양공의 모친)와 한성판윤 변남용의 후배이신 정부인 파주염씨>는 동일인(同一人)이라는 가정은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능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능선
작성일 11-12-19 15:45

태조 8권, 4년( 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12월 11일 경자 1번째기사
변혼이 아버지 재취 부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하여 간관이 변혼의 이혼을 청하다
 
전 개성 윤(開城尹) 변남룡(卞南龍)이 죽은 판서(判書) 이송(李竦)의 아내 염씨(廉氏)에게 장가들고, 남룡의 아들 변혼(卞渾)이 또 이송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간관(諫官)이 혼의 처와 이혼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능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능선
작성일 11-12-19 17:57

조선시대 이혼에 대하여(조선견문록)




조선시대에도 이혼이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혼에 대해 가장 먼저 나타난 기록이 태조 4년(1395)년 12월 1일이라 자못 역사가 깊다고 하겠는데, 국가가 명한 최초의 이혼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국가가 이혼을 명하였느냐는 생각이 들지만 내용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으니 그것을 소개. 변남룡(卞南龍)이라는 사람이 죽은 판서(判書) 이송(李竦)의 아내였던 염씨(廉氏)라는 여자에게 장가들고. 조선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재혼

문제는 변남룡의 아들인 변혼(卞渾)과 그의 배필이었다. 변혼이 장가를 들었는데, 배필이 어이없게도 이송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아비와 아들이 역시 같은 어미와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장모가 되고 아들이 사위가 되며, 아버지가 시아버지가 되며 딸이 며느리가 되는 황당한 가족관계가 성립됨으로 ,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의 촌수 또한 따지기가 대단히 애매하다 하겠다. 그러니까 국가가 개입하여 이혼을 명하였을 것이다.

불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불곰
작성일 11-12-19 19:00

◆◆◆ 능선님!!! 잊지 않으시고 답글을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 <군부판서공(諱 竦)의 후배이신 곡성염씨(익양공의 모친)께서 전 개성 윤(開城尹) 변남룡(卞南龍)의 후배(재취)가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 그리되어 염제신의 따님이신 <군부판서공(諱 竦)의 후배이신 곡성염씨(익양공의 모친)의 묘소>가 천안시 직산면에 있으며, 그 변씨 가문에서 묘소를 수호관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 의문점이 많이 풀려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休文님의 댓글

profile_image 休文
작성일 11-12-19 20:48

이송(李竦)의 아내 염씨(廉氏)가 이송이 죽자 변남룡(卞南龍)에게 재가(再嫁)하였고, 변남룡의 아들 변혼(卞渾)이 또 이송(李竦)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것입니다. 변남룡에게 재가한 곡성염씨의 묘소는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남산리 산 37-1 (남산3길 36-10)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 1395년(태조 4) 12월 11일(경자)條 기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庚子/前開城尹卞南龍娶故判書李竦妻廉氏, 南龍子渾, 又娶竦女。 諫官請離異渾妻, 上允。
국역문 :
전 개성 윤(開城尹) 변남룡(卞南龍)이 죽은 판서(判書) 이송(李竦)의 아내 염씨(廉氏)에게 장가들고, 남룡의 아들 변혼(卞渾)이 또 이송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간관(諫官)이 혼의 처와 이혼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불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불곰
작성일 11-12-19 21:36

◆◆◆ 休文님 잊지 않으시고 답변 주시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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