見麗史列傳抄錄無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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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작성일11-11-19 23:57 조회347회 댓글1건본문
高麗史 列傳의 ‘無子’를 抄錄함.
한 시대의 이름난 분들이 후손(아들)을 두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 다는 것이 虛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尹莘傑 官至僉議評理封杞城君. 卒年七十二謚莊明. 無子.
○安軸 輔 謚文敬. 無子.
○崔瀣 忠惠後元年卒年五十四. 嘗選本國名賢詩文題其目曰東人之文凡二十五卷. 所著拙藁二
卷 行於世. 無子.
○李晟潭陽人. 忠肅元年弃官南歸加民部典書致仕. 後爲化平府使未幾又辭. 卒年七十五無子.
○趙廉 忠惠後二年乞骸骨歸老全州忠定二年卒年七十四. 無子.
○李齊賢 寶林. 官至政堂文學封雞林君. 卒謚文肅無子.
○李公遂 辛禑二年配享恭愍廟庭無子.
○白文寶 二十三年卒謚忠簡. 性廉潔正直不惑異端善屬文. 無子.
○吳延寵 王重之命近臣監護喪事百官會葬無子.
○柳仁著貞州人謚貞簡 登科爲宰相不以富貴驕人有儒者風無子.
○高兆基 初名唐愈耽羅人 十一年卒無子輟朝三日命有司護喪賜謚.
○崔惟淸-累遷樞密院副使以伯父宗峻親嫌不得入省卒年五十五無子.
○林民庇 中書門下平章事致仕二十三年卒謚文靖無子.
○兪升旦 初名元淳仁同縣人 怡不聽十九年卒謚文安無子.
○李公老 字去華丹山縣人 十一年卒家無擔石無子.
○金敞 判吏部事卒無子臨歿語其姪方慶等辭國葬謚文簡.
○李藏用 火葬無子忠烈王元年追謚曰文眞.
○金就礪 忠肅元年東還卒于道. 謚榮信無子.
○李勣砥平人父俊善大將軍. 性又儉素雖至貴顯常處陋室晏如也. 無子.
○兪千遇 卒年六十八謚文度無子外孫朴顓登第官至贊成事.
○張鎰 寶文署大學士修國史致仕尋卒年七十謚章簡無子.
○李混字去華一字太初全義縣人. 子異少穎悟登第任至成均樂正先卒無子.
○尹桓本武人 謚忠孝. 無子以孽女嫁南佐時.
○崔忠獻 沆初爲僧通宋㥠婢生竩適妻無子以竩爲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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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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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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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의 "崔瀣 嘗選本國名賢詩文題其目曰東人之文 凡二十五卷. 所著拙藁二卷 行於世."라는 高麗史의 記錄은 重要한 史料的 價値를 지닌다. 적어도 高麗史가 編纂 刊行된 1454년까지는 崔瀣의 “東人之文”이 知識인 사이에 널리 읽혀졌음을 알 수 있다.
"東人之文"에 擧論된 人物의 略歷은 高麗史 編修 時에 引用했을 것이며 詩는 東文選에 收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列傳의 “無子”라는 記錄도 當時에 異論의 餘地가 없어서 編修官들이 끼워 넣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