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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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작성일11-11-16 00:00 조회454회 댓글5건본문
●●●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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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생은 오늘 다음과 같은 【감사한 징계처분결과 통보】를 받었습니다.
2. 소생을 징계하시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징게위원은 물론 화수회 회장님을 비롯한 이사장님 등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3. 고맙고 감사합니다. 하오나 호소문 관련의 일은 계속할 것이오며, 시조 태사공의 경원사 사당제와 묘제 등에는 건강이 허락하는한 참례할 것입니다.
4. 【징계처분결과 통보 내용】
제목 : 징계처분결과 통보
귀 종인에 대한 징계처분결과를 다음과 같이 통보합니다.
가. 인적사항(1명)
● 이덕규(전서공파 29세)
나. 징계처분 결과
● 권리박탈 : 임원자격과 회원자격을 박탈한다.
다. 징계처분 근거
● 화수회본부회칙 제31조 제2항 제1호 ․ 제3호
라. 처분일자 : 2011년 11월 9일. 끝.
전의 ․ 예안화수회본부 회장 이 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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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담자 : 이근재
우 130-844 서울 동대문구 장안1동 423-16 http//www.jyl.cc/
02-2247-4273 070-8826-4722 전송 2247-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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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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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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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11월 20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개나 돼지만도 못한 매국노 무리의 악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 일로 64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면 여론을 듣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신(神)의 말만 듣는다.
청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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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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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시일야방성대곡 뒤에 숨은 장지연
내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접하게 된 것은 1960년 4.19혁명 직전인 고등학교 2학년 초의 일로 기억된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 당시에 우연히 내가 접한 이 글은, 젊은 피를 끓게 하였고, 경찰봉으로 생긴 뒤통수의 혹은 영광의 상징이었다. 심장에서 용솟음치는 주체할 수 없는 정의의 피는 나를 교실에 그냥 남아있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후 그의 이 글은 오랜 동안 나의 몸속에 남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날 때마다 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리고 분노마저 일으킨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마저 흐리게 한다.
왜 진작 몰랐을까?
무엇이 그를 방성대곡의 뒤에 숨게 하였나?
무엇 때문에 그는 방성대곡의 병풍을 쳐놓고, 그 병풍 뒤에 숨어서 대곡(大哭)이 아닌 대곡(大曲)의 친일찬양노래를 힘차게 불러댔나?
그래놓고 왜 말년에 만취에 빠졌나?
앞뒤가 안 맞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아니면 크게 써주지 않는 일제에 이용당한 것이 분해서?
왜 하필 정의와 항쟁의 고장 마산에서....
그래서 장지연은 내 몸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내가 인식하고 있는 시일야방성대곡은 한낱 장지연 바로 미래의 자신을 향하여 지은 최대의 패러디일 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희의 문턱에 서서 그를 부끄러워하며...
- 전서공파 27세 根在 -
<백과사전에 수록된 장지연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일본 침략의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한 글로 널리 알려졌으며, 때문에 그는 언론인으로서 일본 침략에 저항한 공적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지연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기고자로 참여하여 그 해 12월 23일부터 1918년 7월 11일까지 발표한 시와 산문 중에서 친일 경향의 글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알려지면서 친일 행적을 둘러싸고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1915년 12월 26일 <매일신보> 1면에 실린 글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인용해 '조선 사람은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개탄하였다. 또한 친일 불교단체로서 1914년 이완용 등이 발기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간사를 역임하는 등 일본 총독부의 지배에 순응하고 다양한 형태로 협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그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언론 부문의 해당자로 수록되어 논란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논란 끝에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영예수여 및 취소안’이 심의·의결되어, 서훈이 박탈되었다. 그는 만년에 실의에 빠져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취에 이르도록 술을 마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신보>를 그만둔 뒤에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생활하였으며, 1921년 10월 2일 사망하였다. 마산시 합포구 현동에 묘가 있다
[출처] 장지연 [張志淵 ] | 네이버 백과사전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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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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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화수회는 단순한 친목회가 아니다. 핏줄로 이어진, 부계 혈연으로 이어진 후손들의 모임이다. 同根連枝이다. 감정적인 일처리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영조는 보위를 위해 자식을 죽였다. 혜경궁 홍씨는 친정의 당론에 따라 뒤주 속 남편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정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일갈했다.
임원자격과 회원자격을 박탈한다고 해서 그분들은 전의이씨가 아니란 말인가? 시조를 뱃사공으로 폄훼하고 조상을 모록(冒錄)하여 알지도 못하는 성씨의 여인을 배위로 같다가 붙여놓는 그런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종사를 위하는 자란 말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축이나 읽는 자만이 진정 조상을 위하는 자일까? 우리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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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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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祭酒公 諱 昪의 父가 諱 翊이라는 기록이 文化柳氏譜에 있다고 화수에 본부에서 단정지어 말씀하셨는데, 그 기록이 있으면 본란에 꼭 올려 주십시오. 전체 종인이 알아야겠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능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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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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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넓은벌님께서 지적하신 글 읽어보니 눈물이 납니다.......
이젠 어찌 하여햐 합니까?
특히 불곰 덕규 대부님께서 마음에 상처가 크신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