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의 유한(遺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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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작성일11-10-28 20:26 조회296회 댓글2건본문
근본을 찾으려는 고산선생의 편지 일부(2)-고산선생문집에서
우리 가문은 본래 전의(全義)에서 유래했는데 나뉘어져 본관이 둘이 되었습니다. 이적(移籍)할 즈음에 반드시 자취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상고(詳考)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후손의 유한(遺恨)이 되었으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조의 선조의 가르침은, 이즈음에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 국사(國史)에 실려 있지도 않고, 또 금석문자로 남아있는 것도 없으니, 지금 증명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태사공(太師公)께서 분봉(分封)되신 지 사오백년이 흘러 제학(提學) 선조에 이르러 비로소 이적(移籍)했다는 것도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여항(閭巷)에 대대로 전해 오는 말을 수백 년 전 일이라고 하여 의심만 해서는 되지 않을 듯합니다.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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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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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여항1[閭巷] = 여염(閭閻) =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
여항간 = 촌간 = 시골 마을의 사회.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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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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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익양공은 어머니가 근 90이상을 사신분이고, 격동기를 겪은 산 증인인데 왜 남편과 아들의 집안 내력에 대하여 일러 주시지 않아 후손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게 했는지, 의혹만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