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선성)의 지명 유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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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작성일09-04-17 09:35 조회463회 댓글5건본문
예안(宣城)의 지명 유래
禮安面
桂谷里 / 歸團里 / 九龍里 /
棄仕里 / 道木里 / 道村里 /
東川里 / 美質里 / 浮浦里 /
三溪里 / 新南里 / 仁溪里 /
鼎山里 / 舟津里 / 川前里 /
台谷里 /
禮安面
예안 지방은 고구려 때 매곡현(買谷縣)에 속하였으며 신라 때는 선곡현(善谷縣)으로 내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이었다가 고려 태조 당시 성주(城主)로 있던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하여 귀순하였으므로 선성(宣城)으로 고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그 뒤 1018년(현종 9)에 길주(吉州) 즉 안동 땅에 복속되었다가 1376년(우왕 2)에 우왕의 태(胎)를 이 고을에 묻은 것을 기념하여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얼마 뒤에 주(州)로 승격시켰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또, 공민왕 때 현으로 승격시킨 예안 동쪽에 있는 의인현(宜仁縣)을 병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3년(태종 13) 현(縣)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禮安郡)이 되었다. 읍내, 서면, 북면, 의서, 의동, 동상, 동하 등 7개 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통폐합에 따라 안동군에 편입되어 예안면이 되고, 동북부는 도산면, 녹전면 등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예안면은 의동면의 분천리, 동상면의 인계리 일부, 그리고 북선면의 외감애리, 동후면 나소곡리,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옛 예안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면으로, 그 관할 지역은 동부, 서부, 선양, 천전, 오천, 부포, 귀단, 태곡, 인계, 동천, 도촌, 삼계, 신남 등 13개 마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 지역에 안동다목적댐이 건설되면서 많은 동리가 수몰됨에 따라 행정구역의 변경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1974년 월곡면(月谷面)을 폐지하고 교통의 편의에 따라 오천리는 와룡면에 편입시키고, 예안면의 9개 리와 전 월곡면의 정산, 구룡, 미질, 주진, 계곡, 도목, 기사 등 7개 리를 편입시켜 1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삼계출장소를 두어 삼계, 동천, 도촌, 신남, 인계 등 5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1995년에는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폐합됨에 따라 현재 16개 법정리에 20개 행정리로 되어 있다.
예안면의 면적은 164.00㎢이며, 인구는 2,784명(2001.12.31)으로 안동시에서 동북단 24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소재지는 정산리이다. 면의 서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와룡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임동면(臨東面), 동쪽은 영양군(英陽郡)과 접하고 있다. 면의 중앙부를 낙동강 지류인 동계천(東溪川)과 구계천(九溪川)이 흘러 면의 서쪽 경계를 흐르는 낙동강에 합류되며, 동계천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은 운남산(雲南山) 등 산지를 이루며 경지 면적은 매우 협소하다. 예안면은 총면적의 78%가 임야인 산간오지의 면으로 20개리 가운데 13개 리가 안동호와 인접하고 있다.
1. 桂谷里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됨으로서 예안면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계곡리는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 수는 30여호이다.
◇ 앞시골․전시곡(前是谷)
계일 건너 동쪽으로 1.5㎞쯤 되는 긴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계일 앞 골에 있다하여 앞시골 혹은 압시골로 부르며, 한자로는 전시곡이라 한다. 동리가 길어서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을 상앞시골 혹은 내전실이라하며, 거리에 있는 마을을 거리앞시골 혹은 걸앞시골이라 부른다.
◇ 걸앞시골․거리앞시골
앞시골 거리에 있는 마을로 걸앞시골 혹은 거리앞시골이라 부른다. 전주류씨 4집을 포함하여 10 가구가 살고 있다.
◇ 웃게일․윗계일(上桂日)
계일(桂日)은 장성백이 마을 남쪽 안동호가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적으로 계화낙지(桂花落地)의 형국이라 하여 계일이라 불렀으며 윗계일과 아랫계일로 나눈다. 주로 전주류씨(全州柳氏)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안동댐으로 인해 아랫계일은 모두 수몰되고 윗계일에 전주류씨 7가구만 남아 있다.
옛날 규중처녀가 저녁에 머리를 감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뒤 당(堂)을 짓고 동제(洞祭)를 지냈다하며, 당(堂)터는 좋은 묘자리로 사람들이 욕심을 부렸지만 묘를 쓸 경우 동리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갈매골, 갈마골, 갈마곡(葛馬谷):계일 남동쪽 강 건너편에 위치한 골로서 골 입구에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의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갈마골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이 줄면 드러나고 만수가 되면 수몰된다.
◇ 장성백이․장성배기․장성백리(長城百里)
계일 북쪽 500m 지점 산기슭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로 하할지 마을에서 동다리로 가다가 마을부근에서 우측의 작은 다리를 건너 약 400m쯤 들어가면 장성백이 마을이다. 동구에 이정(里程)을 알리는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장승이 있는 이 마을의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장승이 서있는 대백이라는 뜻으로 장성백이, 장성배기라하며, 또 장성백리라 표기하기도 한다.
현재 수몰로 농사지을 경작지가 많지 않아 주로 담배와 같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댐 물이 호수를 이루고 있다.
2. 歸團里
이 마을은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이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귀단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가구 수는 60여호를 헤아린다. 귀단 1리는 고통, 와운데, 지촌으로 이루어지며, 2리는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 고통(高通)
이 마을은 옛날 귀단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하나 지금은 4집만이 살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고암사(高岩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마을이름은 고통 혹은 고개라고 부른다. 고통이라고 부르는 유래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서 청량산(淸凉山)으로 몽진할 때 이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즉, 높은 분〔高〕이 지나간〔通〕마을이란 의미이다.
◇ 와운데․왕운대(王運臺)․구름들[雲坪]
승짓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17가구가 산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이 봉화의 청량산으로 몽진할 때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왕운대라고 불렀으나 발음하기 쉽게 와운데라 부른다. 또,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운중선자(雲中仙子)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조성당(操省堂) 김택용(金澤龍, 1547~1627) 선생이 구름들이라 했고, 바위가 흩어져 있는 모양이 꼭 구름이 흩어져 있는 것 같아서 와운대(臥雲台)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연곡(燕谷):와운대와 지촌 사이에 큰골이 있었는데, 그 형국이 제비가 날아 앉은 형국이라 하여 연곡이라 하였다.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이 되어 주민들은 댐의 언덕 위(새마)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 지촌(芝村)․성조동(聖祖洞)․승짓골․성지골(聖芝谷)
와운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성조동이라 불렀는데 변해서 승짓골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성지골 혹은 지촌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수몰 지역이라 일부는 이주하였으며 수몰(水沒) 전에는 20여 가구가 살았다.
◇ 가래실․갈내실(葛內室)․갈전(葛田)
인갤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동계천(東溪川)이 흐르고 그 둑과 마을 주위에 갈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가래실, 갈내실, 갈전 등으로 부른다. 안동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어 몇 집만이 언덕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생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인겔․인포(仁浦)
고통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인겔, 인갤, 인포라 불렀으며 앞에 동계천(東溪川)이 흘렀다. 현재 수몰된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지명만 전한다.
◇ 금곡(金谷)․쇠이골
인갤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3가구가 살고 있다. 지형이 금개구리 형국으로 옛날에 쇠가 많이 났다고 하여 쇠이골, 소이골, 죄이골 등으로 불렀으나 그 후 금곡이라 불렀다. 마을 주변에는 옛날 금을 캐던 금굴이 남아 있으며, 금을 캐는 사람이 여러 번 내왕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 뒷산에 무성한 푸른 솔에서 유래되어 소이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지금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 노루메기:음달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2집이 살고 있으며 ‘주장고모형(走獐顧母形)’이라 부르는 봉화금씨(奉化金氏) 시조의 묘가 있다.
◇ 한자골․한재골
금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고개, 즉 한〔大〕재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한재골로 불렀으나 변하여 한자골로 부르게 되었다.
◇ 새마을․새마
인갤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 또는 새마라고 한다. 새마 건너편 산기슭에서 살던 주민들이 1968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마 혹은 새마을이라고 불렀다. 현재 강릉김씨 8집이 살고 있다.
3. 九龍里
옛날 안동군 임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구렁이 있으므로 구렁, 또는 구룡방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달리, 양옥동을 병합하여 구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구룡리는 동다리, 원구룡, 소월, 양옥, 원심이, 한바우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 수는 약 100호이다.
◇ 동달리(東達里)․동다리․동교(東橋)
이 마을은 옛날에 마을 동쪽 구룡천(九龍川)에 큰 다리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동교리라 불러오다가 예안 삼산(三山)에 거주하던 전주류씨삼산종택(全州柳氏三山宗宅) 및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1842~1924) 공이 갑오년(1894)에 동학(東學)의 난(亂)을 피하여 이곳으로 와서 학당(學堂)을 열어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을축년(1865)에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그 장자인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난 이후에 ‘동방에 통달(通達)하신 분이 탄생하였다’하여 동달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전주류씨는 고장(故庄)인 삼산(三山)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안동인(安東人) 괴암(槐巖) 권재훈(權載勳) 공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 다른 유래는 구룡리의 이웃 마을인 계곡리에 전주류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그 세력이 가까운 동다리까지 뻗쳐 번성하게 되었고, 그 사이의 시내에 다리를 놓게 됨으로써 마을 이름을 동다리, 동달리 혹은 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마을의 가구 수는 20여 호로 안동권씨가 7집이 살며, 나머지는 각성받이이다.
◇ 원구룡(原九龍)․구룡(九龍)․구룡방(九龍坊)
구룡리는 행정구역 변경으로 여러 마을을 통폐합하여 지금의 구룡리가 되었는데, 이 마을은 통합되기 전부터 구룡, 구룡방으로 부르던 마을로 원래의 구룡이었다고 하여 원구룡이라 한다.
구룡 마을은 지형이 구룡장주(九龍長走) 혹은 구룡쟁주(九龍爭走) 형국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다스린다는 구룡치수(九龍治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 용당수보:마을로 흐르는 하천을 막아 만든 보이다.
◦ 골미당, 골마당:살지마을에서 원구룡 쪽으로 넘어오는 고개에 있는 당(堂)으로 일제강점기 때 영월신씨 가운데 한 장수가 있었는데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하고, 그가 탄 말만 돌아왔는데 이곳에서 죽었으므로 그 자리에 금줄을 치고 가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린다고 한다.
◇ 소월(小月)․장따리
원구룡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로 소월 혹은 장따리, 장따리말이라고 한다. 뒷산이 반달모양으로 생겼으며, 또 마을 앞 뒷산이 모두 높아 달을 오래 볼 수 없어서 소월이라 이름하였다는 설이 있다. 현재 소월 마을과 양평을 합해 20여 호가 살고 있으며, 마을에는 현재 폐교된 계곡초등학교 자리에 안동과학대학 구룡연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 양평(陽坪):소월 북편(北便) 바로 옆 마을이다. 근처가 산이 높고 골이 깊으나 이곳은 조금 넓은 편으로 다른 곳은 볕을 오래볼 수 없는데 이곳은 보다 오래 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양옥(陽玉)․베드기
소월 동쪽 골짜기에 형성된 작은 마을로 양옥, 약옥 또는 베드기라고 부른다. 진성인(眞城人) 경옥재(景玉齋) 이보(李簠, 1629~1710) 선생이 어릴 때 안동 일직(一直)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벼슬은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대곡(大谷) 산중(山中)에 집을 짓고 ‘경옥산인(景玉山人)’이라고 호하고 물외(物外)에 소요자적하였는데, 선생은 경전자사(經傳子史)를 비롯하여 여러 학문에 두루 뛰어나 안동 북문(北門)둑에서 임동 대곡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많아 지금도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의 후손 30여 집에서는 ‘경옥계’를 조직하여 매년 동지 때 이곳에 모여 선생을 추모하고 우의를 다진다. 이 마을은 경옥재 때부터 양옥이라 불렀으며, 옥돌이 마을에서 나왔다고 한다. 현재 양옥 마을에 11집이 살고, 저뒤골에 4집이 살며 대부분이 안동권씨들이다.
◇ 원심이․원심(遠心, 遠深)․온심(溫心)
양옥에서 약 2㎞ 동쪽에 있는 높고 깊은 산골마을로 들에서 멀고 깊다하여 원시미, 원심이, 원심이라 하였으며, 또 이곳이 삼면이 막혀있고 북쪽만 트여 난시(亂時)에 피난에 알맞고 편한 곳이라 하여 온심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가구 수는 8집이다.
◇ 한바우
원심이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동리로 민가는 없고 현재 기도원이 들어서 있다. 한바우로 들어가는 입구의 절벽이 얽은 퇴적암으로 형성되어 있어 다락바위얼갱이 혹은 다락바우얼겅생이라고 부르는데 한바우란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4. 棄仕里
새터 남서쪽에 자리 잡은 동리로 영가지(永嘉誌)에는 ‘속명은 지실어촌이다. 도목촌(桃木村) 북쪽 10리쯤에 고려의 사간(司諫) 권정(權定, 1353~1411)이 우리 태조조(太祖朝)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살았는데 후인들이 그 마을을 이름하여 기사(棄士)라고 하였다. 뒤에 우좨주(禹祭酒; 禹倬)의 후예 직장(直長) 우홍균(禹洪鈞)이 여기서 살았다. 현감(縣監) 박구(朴球)가 이어 살았다. 현(縣)에서 40리 떨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이 마을은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처음에는 지실어촌, 지실이, 기실기, 지시러기 등으로 불렀으며 또 옥산동(玉山洞)이라 하였으나 고려 말에 사복재(思復齋) 권정 선생이 이곳에 은거한 후 기사촌이라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26년 진성인(眞城人) 이수정(李守貞)이 찬(撰)한 고려좌사간사복재권선생정유허비(高麗左司諫思復齋權先生定遺墟碑)를 살펴보면 이 마을을 기사촌으로 부르게 된 유래가 잘 나타난다.
‘옛날 고려의 운명이 끝나려 할 즈음 군주는 황잡(荒雜)하고 정치는 어지러웠는데, 당시 좌사간(左司諫)으로 있던 선생은 뛰어난 문장과 깊은 학문으로 국왕에게 바른 말을 간하다가 뜻을 거슬려 좌천되었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선생의 명절(名節)을 높이 평가하여 누차 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자신의 거처를 옥산(玉山) 속으로 옮기고 이름을 감추고 살다가 1412년(태종 12)에 몰(沒)하자 옥산 기슭에다 장사지냈다. 비석 전면의 고려좌사간(高麗左司諫)이라는 분이 바로 선생의 지조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아는 이가 없었고 유독 촌옹(村翁)과 야로(野老)들만 그의 절개를 높이 여겨 그 마을〔玉山洞〕이름을 기사리(棄仕里:벼슬을 그만둔 마을)라고 지었던 것이다.’
기사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전곡(대밭말), 서당곡, 아휴리를 병합하여 기사동(리)가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기사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구분하는데 전체 가구 수는 90여호로 예안면에서 큰 마을에 속하는 편이다. 기사 1리에는 아마리, 대밭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기사 2리에는 안마을, 대밭말, 서당골, 당목 등의 마을이 있다.
◇ 아마리․아휴리(阿休里)․아촌(莪村)
기사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며 1689년(숙종 15)에 창녕인(昌寧人) 조규승(曺圭承)공이 개척했다고 전해진다.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곳을 지나 가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게 되었다한다. 지금은 아마리, 아마리골, 안마리, 아촌등으로도 부르며 가구 수는 약 40여호이다.
◇ 대밭골․죽전곡(竹田谷)
기사리에는 대밭골로 불리는 2개 마을이 있다. 하나는 아마리 남쪽 안동호(安東湖) 가에 위치한 마을로 기사 1리에 속한 대밭골이며, 다른 하나는 서당골 북쪽에 위치한 기사 2리의 대밭골인데 두 마을 모두 마을을 개척할 당시 무성한 대나무 밭을 베어내고 마을을 이룩하였다 하여 대밭골 혹은 대밭말로 부르며 한자로는 죽전곡이라 한다.
◦ 삼시랑(三侍郞), 삼시랑재:안마을과 기사 2리 대밭골 사이의 목재를 말하는데, 박운봉(朴雲峯), 권사간(權司諫; 權定), 우좨주(禹祭酒; 禹倬) 선생이 넘어 다닌 고개라 하여 삼시랑 혹은 삼시랑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 안마을
정산우체국 앞에서 좌측 길로 접어들어 배나들 가는 길로 1km 쯤 가다가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나 입향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 권영도씨의 6대조 때 이미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구 수는 10집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비롯하여 각성 10여집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 서당골(書堂谷)
기사 2리의 대밭골 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고려가 망하자 기사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 선생이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훈학(訓學)하였다고 하여 서당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구 수는 10여집으로 예전에는 안동권씨가 많이 살았다.
◇ 당목․길마재
구(舊) 기사에서 예안면 미질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목이라고 부르며 인가 3~4호가 살고 있다. 모양이 소 지르매처럼 생겼다고 하여 길마재 혹은 지르매재라고도 불렀다.
5. 道木里
수몰전 이 마을은 원래 영양남씨(英陽南氏)와 흥해배씨(興海裵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조선조에 학행으로 군위훈도(軍威訓導)에 천거된 영양인(英陽人) 남첨(南襜) 선생이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을 취택(取擇)하여 와룡면 주촌(周村)에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도목(桃睦) 또는 도목촌(桃睦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점쟁이가 와서 마을 주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도목촌(道木村)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또 도목(道睦)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려 후손들이 8칸의 정사(精舍)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道睦精舍)’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도(道)로서 일족을 돈목(敦睦)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영가지의 부북(府北) 임하현(臨河縣)에 실린 도목촌 부분을 보면 ‘도목촌은 현(縣)의 북쪽 35리에 있으며 본부(本府)에서 3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인데, 이곳에는 100여자 되는 석벽(石壁)이 있어 이를 ‘검암(儉巖)’이라 불렀으며, 그 바위 위가 평평한데 대(臺)를 지어 이름하기를 ‘임연(臨淵)’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 배삼익(裵三益) 공이 여기에다 대를 짓고서 임연이라 자호하였는데 관찰사의 선군(先君) 증참판(增參判) 배천석(裵天錫, 1523~1573) 공이 처음 와서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배천석 공이 서후면 금계(金溪)로부터 도목촌으로 이거한 이래 공의 아들인 임연재(臨淵齋)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벼슬이 황해관찰사에 이르렀으므로 그 친우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이 이 마을의 이름을 ‘도맥(道脈)’으로 부르기를 권했으나, 공은 과분하다고 하여 ‘도목(桃木)’으로 정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목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리와 동후면의 구미동, 신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목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도목촌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도목리의 가구 수는 3개 반에 약 30호로 가래골, 구미, 오미골 등의 마을에 나누어져 있다.
◦ 매봉재:도목에서 예안면 주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형이 매의 형국으로 생겼다한다.
◦ 질재:도목에서 예안면 미질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호고개:구미에서 도목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 구미(九尾)
도목 마을 등 너머에 위치한 마을인데 도목에서 구미로 오가는 길이 여러 짐승의 꼬리같이 구불구불하다하여 구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몰 전에는 30여 가구였으나 지금은 8가구가 산다.
◇ 오미골․오목골
도목촌 뒷골목이며, 기사에서 재를 넘어 도목으로 가는 길목이 되는 마을로 오미골 혹은 오목골이라 한다. 산지를 개간하여 특수작물을 생산하고 있으며 농가 5가구가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6. 道村里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쳐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한창 때는 3, 4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피박 혹은 피박골로도 부른다. 피박골로 부르는 이유는 사래실 앞산에 고지박을 닮은 명당이 있는데 그곳을 껍박이라 하며 한자로 쓰면 피박(皮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마을은 사례실, 평지마, 지통마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약 40호이다.
◇ 사례실․사래곡(砂來谷)
평지말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이 깊고 산기슭에 형성된 밭의 사래(이랑)가 하나같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례실, 사래실, 사래곡 등으로 부른다.
◦ 회방(回方)잇골, 회뱅이:사래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살지 않는다.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성해 망하였다고 하며, 또 묘자리와 관련된 풍수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김씨(金氏) 문중에서 풍수가 정해 준 묘터를 파자 반석이 나와서 하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사위의 극력 반대로 다른 곳을 파기로 결정하고 반석을 괭이로 내리치니 반석이 깨어지면서 학(鶴) 두 마리가 나와 한 마리는 눈을 다쳐 잡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날아가다가 회방(回方:다시 돌아옴)하여 이웃 마을인 동천리(東川里)의 원학(遠鶴)에 앉았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회방잇골 또는 회뱅이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때 눈을 다쳐 잡힌 학은 관(棺)과 함께 묻어 버렸는데 그 후에 이 가문에서는 눈이 애꾸인 진사(進士) 한 분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묘터는 고지박을 닮았다고 해서 지금도 고지혈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 평지마․평지촌(平地村)
길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도촌리의 자연마을은 대부분 골짜기에 분포되어 있으나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넓은 지역에 터를 잡아서 평지마, 평지말, 평지촌 등으로 부른다.
◦ 토골(兎谷), 톳골:평지말 동쪽에 있는 골로서 뒤에는 토골재가 있고, 옥(玉)토끼가 달을 바라다보는 형국인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안동김씨 명당이 있다하여 토골, 토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 오미골(烏尾谷, 烏味谷):평지마을 남동쪽에 위치하며 마을로 뻗어 내린 뒷산 줄기의 끝이 마치 까마귀의 꼬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오미골, 오미곡이라 한다. 십 리나 되는 긴 골짜기에 1, 2km씩 뜸뜸이 흩어져 살고 있다.
◦ 새몰, 새몰터, 새
댓글목록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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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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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위 본문의 출처는.. http://www.adfm.or.kr/ > 학술조사연구 > 발간도서
월천이한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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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이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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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우리성씨의 중파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준설형님 우리일가들에게 다함께 알고 또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아주 고귀하 자료라고 사료됩니다. 감사합니다.
월천이한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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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이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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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위자료 복사가 다 안되었습니다. 16번까지 되어야하는데 이상하게도 다 안된 이유를 모를 겠습니다.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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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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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댓글이 2건 이상이면 수정도 안되서 추가 기록을 할 수도 없고요..왜 근런진 몰라도..그 아래 답글로 추가로 올리려해도 잘 안되고요..그래서 나머지 자료를 꼭 보실려면..위 출처로 들어가서 학술조사연구에서 안동의 지명을 클릭하여 보시기 바랍니다...관심을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월천이한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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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이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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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서서히 잘못된것은 정정토록 메모해 놓으셨다가 개선해 가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