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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예안(선성)의 지명 유래(2)..(윗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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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작성일21-03-10 16:53 조회1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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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예안(선성)의 지명 유래(2)..(윗 글에서 계속...)



 윗솥우물 북쪽 산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묘와 재실이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는 '정정촌은 현(縣)의 북쪽 50리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 옛 우물이 있어 낙동강과 5리 떨어져 있는데, 낙동강 물이 흐리고 맑음에 따라 우물 역시 흐리고 맑았다'고 하였다. 이 우물은 원래 3개였으나 하나를 메워버려 현재 2개만 전하는데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천전리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시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 상천(上川)·웃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가로지르고 위쪽에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천 혹은 웃내앞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천전동 밑에 살던 주민들이 수몰로 인해 운남산(雲南山) 중턱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 중천(中川)·중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있고 마을 가운데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천 혹은 중(中)내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수몰로 인해 산 중턱에 옮겨 살게 되었다. 또, 수몰 전 동네 앞에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동리에서 강으로 흐르는 두 하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중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안동댐으로 인한 수몰 전에는 27, 8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3가구가 살고 있다.


▶ 하천(下川)·가태골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강 아래에 자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천이라 부르며, 하래골, 가래골 등으로도 불렀다. 천전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하래골로 불리어 오다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가태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다.








귀단리


이 마을은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귀단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가구수는 60여호를 헤아린다. 귀단 1리는 고통, 와운데, 지촌으로 이루어지며, 2리는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 고통(高通)


이 마을은 옛날 귀단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하나 지금은 4집만이 살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고암사(高岩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마을이름은 고통 혹은 고개라고 부른다. 고통이라고 부르는 유래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서 청량산(淸凉山)으로 몽진할 때 이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즉, 높은 분〔高〕이 지나간〔通〕마을이란 의미이다.


▶ 와운데·왕운대(王運臺)·구름들[雲坪]


승짓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17가구가 산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이 봉화의 청량산으로 몽진할 때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고 해서 왕운대라고 불렀으나 발음하기 쉽게 와운데라 부른다. 또,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는 운중선자(雲中仙子)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조성당(操省堂) 김택용(金澤龍, 1547∼1627) 선생이 구름들이라 했고, 바위가 흩어져 있는 모양이 꼭 구름이 흩어져 있는 것 같아서 와운대(臥雲台)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연곡(燕谷):와운대와 지촌 사이에 큰골이 있었는데, 그 형국이 제비가 날아 앉은 형국이라 하 여 연곡이라 하였다.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이 되어 주민들은 댐의 언덕 위(새마)로 이주하여 농 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 지촌(芝村)·성조동(聖祖洞)·승짓골·성지골(聖芝谷)


와운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성조동이라 불렀는데 변해서 승짓골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성지골 혹은 지촌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수몰 지역이라 일부는 이주하였으며 수몰(水沒) 전에는 20여 가구가 살았다.


▶ 가래실·갈내실(葛內室)·갈전(葛田)


인갤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동계천(東溪川)이 흐르고 그 둑과 마을 주위에 갈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가래실, 갈내실, 갈전 등으로 부른다. 안동댐으로 인해 마을이 수몰되어 몇 집만이 언덕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생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한다.





▶ 인겔·인포(仁浦)


고통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인겔, 인갤, 인포라 불렀으며 앞에 동계천(東溪川)이 흘렀다. 현재 수몰된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지명만 전한다.


▶ 금곡(金谷)·쇠이골


인갤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3가구가 살고 있다. 지형이 금개구리 형국으로 옛날에 쇠가 많이 났다고 하여 쇠이골, 소이골, 죄이골 등으로 불렀으나 그 후 금곡이라 불렀다. 마을 주변에는 옛날 금을 캐던 금굴이 남아 있으며, 금을 캐는 사람이 여러 번 내왕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 뒷산에 무성한 푸른 솔에서 유래되어 소이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지금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있다.


◇ 노루메기:음달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2집이 살고 있으며 '주장고모형(走獐顧母形)'이라 부르 는 봉화금씨(奉化金氏) 시조의 묘가 있다.


▶ 한자골·한재골


금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고개, 즉 한〔大〕재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한재골로 불렀으나 변하여 한자골로 부르게 되었다.


▶ 새마을·새마


인갤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 또는 새마라고 한다. 새마 건너편 산기슭에서 살던 주민들이 1968년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마 혹은 새마을이라고 불렀다. 현재 강릉김씨 8집이 살고 있다.








기사리


아마리, 아마리골, 아휴리(阿休里)


조선 숙종 15년 昌寧人 曺圭承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 곳을 지나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아마리로 부른다. 선암골 선암동(仙岩洞) 永川 李氏인 李公이 전사했는데 그가 탓던 말과 말방울이 이 곳에 돌아 왔다. 이에 仙岩堂을 지어 그의 영혼을 모셨으므로 동명을 선암골로 부르게 되었다.





▶ 서당골 서당곡(書堂谷)


고려가 망하자 기사에서 은거 생활을 한 佐司諒 權 正이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훈학을 하였기에 후일에 서당골로 부르게 되었다. 안동 權 氏의 동족 부락이다.


▶ 기실기, 기시러기, 기사리(棄仕里)


고려말 安東府臨河縣 玉山洞 桃木村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부터 棄仕里가 되었다. 산기슭에 위치하므로 기실기라 하였으며, 1974년에 월곡면에서 예안면으로 편입되었다. 또 權司諫 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곳에서 기사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대밭말 대밭골 죽전곡(竹田谷)


대밭을 개척하여 이룩하였다 하여 대밭말이라 한다. 개간지가 많으며 사과밭을 갖고 있는 5호 외에는 모두 고추·깨·땅콩 등의 특수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도촌리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처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한창 때는 3, 4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피박 혹은 피박골로도 부른다. 피박골로 부르는 이유는 사래실 앞산에 고지박을 닮은 명당이 있는데 그곳을 껍박이라 하며 한자로 쓰면 피박(皮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마을은 사례실, 평지마, 지통마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40호이다.





▶ 사례실·사래곡(砂來谷)


평지말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이 깊고 산기슭에 형성된 밭의 사래(이랑)가 하나같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례실, 사래실, 사래곡 등으로 부른다.


◇ 회방(回方)잇골, 회뱅이:사래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살지 않는다.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성해 망하였다고 하며, 또 묘자리와 관련된 풍수이야기 가 전해진다. 옛날 김씨(金氏) 문중에서 풍수가 정해 준 묘터를 파자 반석이 나와서 하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사위의 극력 반대로 다른 곳을 파기로 결정하고 반석을 괭이로 내리치니 반석 이 깨어지면서 학(鶴) 두 마리가 나와 한 마리는 눈을 다쳐 잡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날아가다 가 회방(回方:다시 돌아옴)하여 이웃 마을인 동천리(東川里)의 원학(遠鶴)에 앉았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회방잇골 또는 회뱅이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때 눈을 다쳐 잡힌 학은 관(棺)과 함께 묻어 버렸는데 그 후에 이 가문에서는 눈이 애꾸인 진사(進士) 한 분이 나왔 다고 한다. 그 묘터는 고지박을 닮았다고 해서 지금도 고지혈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 평지마·평지촌(平地村)


길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도촌리의 자연마을은 대부분 골짜기에 분포되어 있으나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넓은 지역에 터를 잡아서 평지마, 평지말, 평지촌 등으로 부른다.


◇ 토골(兎谷), 톳골:평지말 동쪽에 있는 골로서 뒤에는 토골재가 있고, 옥(玉)토끼가 달을 바라 다보는 형국인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안동김씨 명당이 있다하여 토골, 토곡으로 부르게 되 었다.


◇ 오미골(烏尾谷, 烏味谷):평지마을 남동쪽에 위치하며 마을로 뻗어 내린 뒷산 줄기의 끝이 마 치 까마귀의 꼬리와 흡사하다고 하여 오미골, 오미곡이라 한다. 십 리나 되는 긴 골짜기에 1, 2km씩 뜸뜸이 흩어져 살고 있다.


◇ 새몰, 새몰터,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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