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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작성일09-04-19 11:58 조회425회 댓글1건본문
◇ 솥우물․정정촌(鼎井村)
정산시장에서 북서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8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가 명천(名泉)이라 정산(鼎山)의 ‘정(鼎)’자와 우물 ‘정(井)’를 취해 지명을 정정(鼎井)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솥우물, 소두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솥우물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세분해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윗마을을 윗솥우물, 아랫마을을 아랫솥우물로 부른다. 윗솥우물 북쪽 산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묘와 재실이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는 ‘정정촌은 현(縣)의 북쪽 50리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 옛 우물이 있어 낙동강과 5리 떨어져 있는데, 낙동강 물이 흐리고 맑음에 따라 우물 역시 흐리고 맑았다’고 하였다.
이 우물은 원래 3개였으나 하나를 메워버려 현재 2개만 전하는데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14. 舟津里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 배나들․주진(舟津)
고려시대 소금 장수들이 소금을 팔거나 물물교환을 위해 나룻배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부산에서 출발하여 안동을 지나 이곳까지 넘나들었는데 이 때 이곳의 나루터가 선착장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하여 배나들이라고 하였고 한자로는 주진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100여 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이었으나 모두 수몰되고 현재 새로 조성한 마을에 진주강씨 7집과 밀양박씨(密陽朴氏) 7집을 포함하여 약 17호의 주민이 살아간다.
◇ 삼산(三山)
오른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살았는데 조선 숙종 때 전주인(全州人) 류석구(柳錫龜, 1673~1737) 공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서 공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분이 영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류정원(柳正源) 선생이다.
선생의 아호는 삼산(三山)인데, ‘삼산’이란 현재 삼산종택 안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앞산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하여 부르는 것으로 류정원 선생이 이름을 떨치면서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현재 마을 가구 수는 약 30여호로 밀양박씨가 17집이 살며, 전주류씨가 2집이며, 나머지는 각성이다.
◦ 대사간터:대사간을 역임한 류정원 선생이 살았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 오른대․오은대(五隱臺)
배나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주진교에서 오른편 산중턱을 바라보면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로 뒤에 오로봉이 있다. 마을 이름을 오른대, 오른데 혹은 오은대라고 하는데 오른대라고 부르는 유래는 이 마을이 노천 마을 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오룡동 밑이 된다. 수몰 전에는 15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8가구가 살고 있다.
◇ 갈대밭․노천(蘆川)
오른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쪽으로 가다가 주진교를 건너자말자 교각 아래로 우회전하면 현재 주진-천전간 도로확장공사가 진행중인 길이 물가를 따라 서쪽으로 나있다. 여기서 조금 들어가면 갈대밭 마을인데 이곳은 옛날 낙동강변에 갈대가 많아 갈대밭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노천이라 한다. 수몰 전에는 25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10집만 살고 있다.
15. 川前里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 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 상천(上川)․웃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가로지르고 위쪽에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천 혹은 웃내앞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천전동 밑에 살던 주민들이 수몰로 인해 운남산(雲南山) 중턱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 중천(中川)․중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있고 마을 가운데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천 혹은 중(中)내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수몰로 인해 산 중턱에 옮겨 살게 되었다. 또, 수몰 전 동네 앞에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동리에서 강으로 흐르는 두 하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중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안동댐으로 인한 수몰 전에는 27, 8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3가구가 살고 있다.
◇ 하천(下川)․가태골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강 아래에 자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천이라 부르며, 하래골, 가래골 등으로도 불렀다. 천전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하래골로 불리어 오다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가태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다.
16. 台谷里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 서문에서 ‘...송(宋)나라 대중(大中), 천성(天聖) 연간인 현종대(顯宗代)에는 길주(吉州; 옛 안동)에 속했는데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주로 승격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며 그 뒷산에 태를 묻었음으로 그 산을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태곡리는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곡리는 덧재, 물미, 골마, 밭마, 남산, 탯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약 80가구이다.
◇ 덧재․덕현(德峴)․덕재
밖말 남동쪽 덧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세운 정난 일등공신에 책록된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 선생이 출생하고 타계한 곳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 가세가 가난하여 마을에 있는 수양버들 앞에서 글씨 연습을 했는데 비가 오면 도랑물이 검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은 인품이 높고 덕(德)이 많아 이 덕을 기리고자 선생이 태어난 이곳을 덕현 또는 덕재, 덧재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물미․물뫼․문미(文美)․문산(文山)․퇴산(退山)
이 마을 뒷산에 문필봉(文筆峰)이 있는데 이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문필가가 난다는 전설이 있어 이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물미, 물뫼, 문미, 또는 퇴산, 문산이라고 한다.
◇ 골마․소이골․소유골․금곡(金谷)․쇠골동
탯골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한실의 내촌(內村)이므로 골마, 골말 또는 소이골, 소유골, 금곡이라고 부르며 탯골의 하부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뒤에 약물탕이 있는데 큰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이 한발에 관계없이 2㎝ 정도의 구멍으로 사철 솟고 다른 물에 비하여 더욱 차고 그 물에 철분이 많다. 또, 금광(金壙)터가 있었으므로 쇠골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담배와 고추가 주산물이고 탯골에서 시작되는 계곡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태곡리의 마을회관이 있다.
◦ 말굴렛등:골말 앞산에 있는 등성이로 고려 공민왕 때 말이 굴렀다고 한다.
◇ 밖마․밭마․외촌(外村)․탯말․한실(寒室)
태곡리의 중심지를 이루는 마을로 골말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밖마 혹은 밖말, 밭마, 외촌, 탯말, 한실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은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선생의 고조부인 김효우(金孝友)공이 입향하면서부터 대대로 후손들이 살게 되었으며, 마을 경내에 조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천정사(寒泉精舍)가 있다.
◇ 남산(南山)
태곡에서 보아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 한다. 북향 마을로 금씨(琴氏)가 대부분이다. 마을 앞으로 동계천(東溪川)이 안동댐과 합수되어 좁은 면적의 논을 이루고 있으나 만수 위험 지구로 되어 있다. 마을의 서쪽은 안동댐의 돌출부분과 맞닿아 있다.
◇ 탯골․태곡(台谷)․태동(台洞)
고려말 공민왕이 2차 홍건적란(紅巾賊亂) 때 청량산(淸凉山) 산성에서 난을 피하고 있던 중 왕자의 태보(胎褓)를 묻은 산을 태봉(胎峰)이라 하고 그 산 앞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해서 그 이 마을을 탯골 혹은 태곡, 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간댓골:아랫탯골과 웃탯골 가운데에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가운데 골’이 줄어 간댓골로 불리게 되었다.
◦ 주봉재:탯골의 주가 되는 산이다.
자료제보자
예안면
배용기(86세, 정산리), 최동균(정산리), 최덕균(63세, 정산리), 김석희(정산리)
권영도(기사리), 박무한(75세, 주진리), 김두성(67세, 귀단리), 신순식(동천리)
권상목(동천리), 이시한(부포리, 남봉섭(기사리), 남구용(63세, 인계리)
정산시장에서 북서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8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가 명천(名泉)이라 정산(鼎山)의 ‘정(鼎)’자와 우물 ‘정(井)’를 취해 지명을 정정(鼎井)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솥우물, 소두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솥우물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세분해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윗마을을 윗솥우물, 아랫마을을 아랫솥우물로 부른다. 윗솥우물 북쪽 산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묘와 재실이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는 ‘정정촌은 현(縣)의 북쪽 50리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 옛 우물이 있어 낙동강과 5리 떨어져 있는데, 낙동강 물이 흐리고 맑음에 따라 우물 역시 흐리고 맑았다’고 하였다.
이 우물은 원래 3개였으나 하나를 메워버려 현재 2개만 전하는데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14. 舟津里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 배나들․주진(舟津)
고려시대 소금 장수들이 소금을 팔거나 물물교환을 위해 나룻배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부산에서 출발하여 안동을 지나 이곳까지 넘나들었는데 이 때 이곳의 나루터가 선착장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하여 배나들이라고 하였고 한자로는 주진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100여 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이었으나 모두 수몰되고 현재 새로 조성한 마을에 진주강씨 7집과 밀양박씨(密陽朴氏) 7집을 포함하여 약 17호의 주민이 살아간다.
◇ 삼산(三山)
오른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살았는데 조선 숙종 때 전주인(全州人) 류석구(柳錫龜, 1673~1737) 공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서 공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분이 영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류정원(柳正源) 선생이다.
선생의 아호는 삼산(三山)인데, ‘삼산’이란 현재 삼산종택 안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앞산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하여 부르는 것으로 류정원 선생이 이름을 떨치면서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현재 마을 가구 수는 약 30여호로 밀양박씨가 17집이 살며, 전주류씨가 2집이며, 나머지는 각성이다.
◦ 대사간터:대사간을 역임한 류정원 선생이 살았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 오른대․오은대(五隱臺)
배나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주진교에서 오른편 산중턱을 바라보면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로 뒤에 오로봉이 있다. 마을 이름을 오른대, 오른데 혹은 오은대라고 하는데 오른대라고 부르는 유래는 이 마을이 노천 마을 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오룡동 밑이 된다. 수몰 전에는 15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8가구가 살고 있다.
◇ 갈대밭․노천(蘆川)
오른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쪽으로 가다가 주진교를 건너자말자 교각 아래로 우회전하면 현재 주진-천전간 도로확장공사가 진행중인 길이 물가를 따라 서쪽으로 나있다. 여기서 조금 들어가면 갈대밭 마을인데 이곳은 옛날 낙동강변에 갈대가 많아 갈대밭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노천이라 한다. 수몰 전에는 25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10집만 살고 있다.
15. 川前里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 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 상천(上川)․웃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가로지르고 위쪽에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천 혹은 웃내앞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천전동 밑에 살던 주민들이 수몰로 인해 운남산(雲南山) 중턱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 중천(中川)․중내앞
마을 앞에 낙동강이 있고 마을 가운데 자연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천 혹은 중(中)내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수몰로 인해 산 중턱에 옮겨 살게 되었다. 또, 수몰 전 동네 앞에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동리에서 강으로 흐르는 두 하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중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안동댐으로 인한 수몰 전에는 27, 8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3가구가 살고 있다.
◇ 하천(下川)․가태골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강 아래에 자연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천이라 부르며, 하래골, 가래골 등으로도 불렀다. 천전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하래골로 불리어 오다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가태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4가구가 살고 있다.
16. 台谷里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 서문에서 ‘...송(宋)나라 대중(大中), 천성(天聖) 연간인 현종대(顯宗代)에는 길주(吉州; 옛 안동)에 속했는데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주로 승격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며 그 뒷산에 태를 묻었음으로 그 산을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태곡리는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곡리는 덧재, 물미, 골마, 밭마, 남산, 탯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 수는 약 80가구이다.
◇ 덧재․덕현(德峴)․덕재
밖말 남동쪽 덧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세운 정난 일등공신에 책록된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 선생이 출생하고 타계한 곳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 가세가 가난하여 마을에 있는 수양버들 앞에서 글씨 연습을 했는데 비가 오면 도랑물이 검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은 인품이 높고 덕(德)이 많아 이 덕을 기리고자 선생이 태어난 이곳을 덕현 또는 덕재, 덧재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물미․물뫼․문미(文美)․문산(文山)․퇴산(退山)
이 마을 뒷산에 문필봉(文筆峰)이 있는데 이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문필가가 난다는 전설이 있어 이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물미, 물뫼, 문미, 또는 퇴산, 문산이라고 한다.
◇ 골마․소이골․소유골․금곡(金谷)․쇠골동
탯골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한실의 내촌(內村)이므로 골마, 골말 또는 소이골, 소유골, 금곡이라고 부르며 탯골의 하부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뒤에 약물탕이 있는데 큰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이 한발에 관계없이 2㎝ 정도의 구멍으로 사철 솟고 다른 물에 비하여 더욱 차고 그 물에 철분이 많다. 또, 금광(金壙)터가 있었으므로 쇠골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담배와 고추가 주산물이고 탯골에서 시작되는 계곡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태곡리의 마을회관이 있다.
◦ 말굴렛등:골말 앞산에 있는 등성이로 고려 공민왕 때 말이 굴렀다고 한다.
◇ 밖마․밭마․외촌(外村)․탯말․한실(寒室)
태곡리의 중심지를 이루는 마을로 골말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밖마 혹은 밖말, 밭마, 외촌, 탯말, 한실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은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선생의 고조부인 김효우(金孝友)공이 입향하면서부터 대대로 후손들이 살게 되었으며, 마을 경내에 조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천정사(寒泉精舍)가 있다.
◇ 남산(南山)
태곡에서 보아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 한다. 북향 마을로 금씨(琴氏)가 대부분이다. 마을 앞으로 동계천(東溪川)이 안동댐과 합수되어 좁은 면적의 논을 이루고 있으나 만수 위험 지구로 되어 있다. 마을의 서쪽은 안동댐의 돌출부분과 맞닿아 있다.
◇ 탯골․태곡(台谷)․태동(台洞)
고려말 공민왕이 2차 홍건적란(紅巾賊亂) 때 청량산(淸凉山) 산성에서 난을 피하고 있던 중 왕자의 태보(胎褓)를 묻은 산을 태봉(胎峰)이라 하고 그 산 앞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해서 그 이 마을을 탯골 혹은 태곡, 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간댓골:아랫탯골과 웃탯골 가운데에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가운데 골’이 줄어 간댓골로 불리게 되었다.
◦ 주봉재:탯골의 주가 되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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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면
배용기(86세, 정산리), 최동균(정산리), 최덕균(63세, 정산리), 김석희(정산리)
권영도(기사리), 박무한(75세, 주진리), 김두성(67세, 귀단리), 신순식(동천리)
권상목(동천리), 이시한(부포리, 남봉섭(기사리), 남구용(63세, 인계리)
댓글목록
월천이한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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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천이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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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좋은사료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