避諱法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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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작성일11-11-11 11:25 조회482회 댓글11건본문
우리 전의이씨는 태사공부터 9세까지의 휘를 피하여 같은 글자를 쓴 예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10세에 오면 조상의 휘를 그대로 쓴 경우는 보이지 않으나, 밀직부사공 광익(光翊)과 제학공 익(翊)의 휘에 음과 뜻이 같은 익(翊)을 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핏줄의식이 강한 당시에 동성(同姓) 6촌 형제끼리 같은 글자를 썼다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특히 밀직부사공은 광(光)자 항렬이니, 실질적으로 이름 역할을 한 글자는 익(翊)자뿐이 아니겠는가?
판소부사 광기(光起), 밀직부사 광익(光翊), 전의시주부 사걸(俟傑), 상원(上元), 삼보(三寶)와 보문각제학 익(翊), 총랑 도손(道孫), 호조전서 구직(丘直), 대호군 사직(師直), 낭장 선경(先慶)은 재종간(再從間)이다.
10명밖에 되지 않는 재종형제인데, 이름 높은 학자 집안에서 같은 글자로 명(名)을 지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아니면 무슨 곡절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모계중심의 당시 시대 상황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려서 글을 배울 때 ‘旦’을 선생님은 ‘某’라고 읽으시거나, ‘朝’라고 읽으셨다. 바로 태조의 휘를 피휘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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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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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주 좋은 자료이군요..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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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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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넓은벌님!!! 좋은 글을 올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1. <판소부사 광기(光起), 밀직부사 광익(光翊), 전의시주부 사걸(俟傑), 상원(上元), 삼보(三寶)와 보문각제학 익(翊), 총랑 도손(道孫), 호조전서 구직(丘直), 대호군 사직(師直), 낭장 선경(先慶)은 재종간(再從間)이다.>라고 하실 일이 아닙니다.
2. <보문각제학 익(翊)과의 재종간(再從間)>은 우리 이성보의 창간보인 만력보로부터, 숭정보(1634), 영조갑술보(1754), 철종계축보(1853), 고종갑술보(1874), 고종경자보(1900), 무오보(1918) 등 어느 것에도 <재종간(再從間)>이란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3. 예안이씨 제학공파의 족보인, 영조갑신보(1764), 순조임오보(1822), 고종무술보(1898)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4. <재종간(再從間)>이라는 관계는 1927년에 발간한 정묘대동보를 발간하면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5. 그런데, 우리 전의이씨 종인들은 물론 예안이씨 대종회 회원들도 <당시 함께 정묘대동보에 제학공(휘익)의 동생으로 기록된 검교첨의정승 승안군(휘지저)파는 현재 계대가 맞지 않어 종사를 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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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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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재종간(再從間)>이란 표현은 정묘대동보에 의거한 표현일 뿐입니다. <문장불행무후>, <선졸무자>라는 기록을 반박할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의문은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학공파나 승안군파가 전의이씨에서 분파되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을 찾아야겠죠? 염제신과 사돈을 맺은 집안이라면 당대 유력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익양공의 어머니 염씨부인은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의문은 언제나 제학공 익(翊)입니다. '이적예안'.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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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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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염제신과 사돈을 맺은 집안이라면 당대 유력 가문이었을 것}..라는 구절은..핵심을 짚은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10세 익(예안이씨 시조)의 부친은 9세 언승이고..11세 변의 아들이 12세 송인데 그 송의 부인이 곡성염씨(父:염제신)이고..13세가 세종代의 이천과 그 동생 이온(예안으로 4세)이니..이천의 모친이 염씨라고 봅니다...
능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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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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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세 - 염수정(廉守貞), 염승익(廉承益)
: 충정공 염승익(忠靖公 廉承益, ?-1302)은 염순언(廉純彦)의 차남, 고려의 문신, 초명은 유직, 정당문학(政堂文學) 신약(信若)의 후손, 1260년대(24대 원종)부터 관직생활, 슬하에 염세충(廉世忠)을 두셨다.(대동보, 1986).
염승익(廉承益)은 일찍이 악질(惡疾)을 얻어 부처와 신에게 빌어 나은 뒤 환자를 위해 빌어 고치기를 일삼다가 이지저(李之저)의 천거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다. 1263년 판예빈경, 1278년 박항(朴恒)·김주정(金周鼎)·이지저(李之저)등과 함께 이때 처음 설치된 필도지가 되었다. 1278년 공주의 명을 받고 순군(巡軍)과 홀지(忽赤) 등을 풀어 인가를 수색하여 양가의 딸을 징발해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염승익(廉承益)은 1281년 승지율학조교, 1282년 현화사수리, 1284년 총신으로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경상·전라·충청도 도순문사, 재상(宰相=종1품), 1287년 첨의평리(僉議評理), 1288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종1품), 1289년 충렬왕과 공주의 원 방문때 염승익은 조인규(趙仁規), 인후(印候), 안향(安珦)과 함께 수행, 1291년 판판도사사세자보(判判圖司事世子保), 1293년 왕과 공주를따라 원에 다녀왔으며, 1295년 판감찰사(判監察事), 1295년 병으로 사직, 1301년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문하시중/정1품), 1302년 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정1품), 상장군(上將軍), 판전리감찰사사, 충렬왕을 도와서 정가신과 함께 왕에게 천변(天變)을 말하며 덕을 닦도록 요청했다.
또한 허시중(許侍中), 조시중(趙侍中=조인규)과 교대하면서 국정을 잘 다스림으로써, 염승익은 한 동안 고관대작 중 감히 맞설만한 인물이 없었다(문헌록, 1986). 승익은 1302년에 아첨하는 소인배가 되지 않고자, 머리깎고 중이 됐는데, 가사를 입고 숯불을 손바닥 위에 놓고 향을 피우며 염불했으나 안색이 변치 않았다. 시호는 충정공(忠靖公)이시다.(명신록(名臣錄)). (종보 제13호 6면 '손 바닥으로 어찌 하늘을 가리는가'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음.)
[파주염문과 불교] : 고려는 국교가 불교였고, 또 파주염문의 선조분들은 거의 불교의 독실한 신봉자라고 본다. 파주염문에서 불교를 신봉했다는 근거로서 충정공 휘 승익(忠靖公 諱 承益)께서 왕명에 의해 남계원 7층석탑(南溪院 七層石塔-국보 100호)을 세우셨다. 근년에 와서 이 석탑을 옮기게 될 때, 그 기단부에서 발견된 법화경(法華經) 7책의 말미에서 왕가(王家)와 염문일가(廉門一家)를 위한 축원문(祝願文)이 적혀있다. 이를 보아도 충정공께서는 불교를 신봉하셨고, 또 도첨의중찬의 재상직을 역임하시고 물러나 곧 삭발하시고 스님이 되신 기록이 고려사에 적혀있다.
13세 - 염세충(廉世忠)
: 중현공 염세충(中顯公 廉世忠)은 12세 충정공 염승익(忠靖公 廉承益)의 아들, 생졸미상, 아내는 가순택주 조씨(嘉順宅主 趙氏, 평양부원군 조인규의 딸), 슬하에 1남은 염효신(廉孝臣, 생졸미상, 삼사좌윤/三司左尹), 2남은 증흥1세조 염제신(廉悌臣)을 두셨다.
염세충(廉世忠)의 관직은 중현대부(中顯大夫=종3품),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무관직,종3품)이셨다(대동보, 1986).
염세충(廉世忠)은 그의 2남 염제신(廉悌臣, 1304-82)이 6세때에 별세하셨으므로 사망년도는 1309년일 것이다.
14세 - 염효신(廉孝臣), 염제신(廉悌臣)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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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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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남 천안시(구 천원군) 직산면 남산리 산 37번지에 염제신(廉悌臣) 딸 염씨 부인의 묘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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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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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염제신(廉悌臣) 딸 염씨 부인의 묘소라면 <군부사전법사판서공(諱竦) 의 후배 곡성염씨의 묘소라는 것 아닙니까???
2. 그 묘소가 충남 천원군 직산면 남산리 산 37번지에 있다는 것입니까??? 믿을 만한 것입니까???
3. 그런데 어찌 <2007년도에 보문각제학공(諱翊)을 시조로 발간한 정해보>에는 <각심사에 설단하였다>고 기록하였는지????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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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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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원평군부인 곡성염씨( 原平郡夫人 曲城廉氏)의 묘소가 확실한데, 지석(誌石)이나 고비(古碑)의 유무는 알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제가 언급(言及)할 수 없습니다.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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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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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님은..필요한 지식을 많이도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능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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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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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신과 사돈을 맺은 집안이라면 당대 유력한 가문은 또다른 예안이씨 시조와 관련이 있음으로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기록을 보면
염승익(廉承益)은 일찍이 악질(惡疾)을 얻어 부처와 신에게 빌어 나은 뒤 환자를 위해 빌어 고치기를 일삼다가 이지저(李之氐)의 천거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다.
넓은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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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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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어쨌든 익양공의 어머니 곡성염씨(염제신의 딸)는 당대 여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멸문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식들을 온전히 지켜내고 또 자신도 천수를 다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여장부가 아니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