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전의이씨는 화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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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작성일11-05-15 18:23 조회521회 댓글11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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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전의이씨는 화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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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한제공(희옥님)께서 손수 작성한 화벌족(全義李氏 上祖史 第1講)으로서 , 공의 부탁을 받고, 소생이 대신 올리는 것입니다. 다만, 공의 원문을 소생이 대신 올리므로서, 올린 글 중에 오자나 탈자가 있을까 저어됩니다.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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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벌족(華閥族) 전의이씨 상조사 제일강(全義李氏 上祖史 第一講)
필자(筆者) 대사성공파 28세 한제 이희옥
(大司成公派 28世 韓濟 李熙玉)
필자 소개
★ 전의 이씨 대사성공파 28세 한제 이희옥
(全義 李氏 大司成公派 28世 韓濟 李熙玉)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57학번
• 역사 교육학석사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33년간 국사강의
• 학부에서 서양사 전공 대학원에서 한국고대사 전공
• 대학교에서 국사 강의 20여년의 국사학자
• 저서 3권 논문 20여편 한제설, 35개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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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벌족(華閥族)
1. 서설(序說)
문명 문화가 발달하고 인지가 깨일수록 국가 민족 혈통을 외면하고 눈앞의 소리와 이해 득실에만 연연하는 현대의 풍조가 좋은 현상이 아니며 선진국가의 모습도 아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은 몇 대 가지 않아서 조상도 모르고 어느 성씨 어느 집안 자손인지도 모르는 <돌씨>들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요즈음 여러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고 문집을 발간하고 하는 것은 경제적 여건이 옛날보다 호전된 점도 있겠지만 지각있는 분들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고 염려해서 일 것이다.
우리 전의예안이씨는 화수회장님과 이사장님과 일가 어른들께서 창씨 이래 가장 위대한 공적 영사재와 신도비를 건립하고, 새 족보와 휘보를 발간하고, 일가들이 숭조(崇祖)정신을 선양함은 참으로 머리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조상의 음덕에 감사하고, 충신 공신 청백리 가문의 자손으로서 조선(祖先)에 부끄럽지 않도록 근신 자중해야 할 것이다.
우리 전의이씨의 연원과 위대한 선조와 가문을 논하려 함에 연원(淵源), 시조(始祖), 동암수공, 삼파중조, 현달한 조선(祖先) 순으로 전개하려 한다.
아마도 고려 중기부터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먼저 학문상의 문제점인 학설(學說) - (학설, 학위, 대학교수, 출세) - 에 대하여 몇가지 천명하려 한다.
2. 譜學과 門中史
세계에는 로마, 앗시리아, 페르시아, 몽고제국 같이 세상을 주름잡고 호령하던 나라와 민족은 사라졌지만, 그리 넓지 않은 나라(한반도), 별로 많지 않은 민족(3~4천만)의 한국, 한민족과 문화는 연면히 이어져 상존함은 한국의 족보와 족보제도에 있다는 20세기의 석학 버트란드 럿셀경의 말씀처럼 우리나라의 족보는 참으로 거룩하고 중요한 보물이다.
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보학을 취급하지만 너무나 미약하다. 또한 각 문중마다 문중사를 편찬키도 한다. 그러나 많은 외침으로 문화재와 기록들이 소진되어 알 길이 없고 찾을 바가 없어 부실하고 어쌕함이 많다.
우리 문중의 종사록도 마찬가지이며 뱃사공 자손을 만들어 놓았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3. 華閥族. 〔(빛)• (공로, 지체, 기둥)• (계레. 성)〕
화벌보(華閥譜)는 조선 세종조 정미년(1427)에 편찬된 것으로써 고려조에서 개국공신으로서 대대로 녹봉을 받은 공신, 명신들의 방명을 수록하였는데
홍유(충열) 배현경(무열) 신숭겸(장절) 유금필(충절) 복지겸(무공) 김선궁(순충) 김총언(태사) 김선평(대사) 권행(태사) 장정필(장길 태사) 윤신달(태사) 최준옹(태사) 문다성(무열) 이능희(정열) 이도(태사) 허선문(장경) 구존유(충열) 원극헌(충간) 금용식(열성) 김훤술(장열) 한란(위열) 강여청(충의) 손긍훈(무열) 방계홍(충공) 나총례(충문) 이희직(충민) 염방명(경절) 최필달(충열) 전홍술(충열) 등 벽상공신 43가의 시조 성명이 수록되었다. -벽상공신-해설
이 화벌보에 수록된 이른바 화벌족(華閥族)은 고려 이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서 자부와 긍지를 가지게 하여 화벌족으로서 그 명문 자손으로서 무상의 영광이요, 자랑으로 여겨왔다.
우리 전의이씨 문중은 충신, 명신, 공신, 청백리가 가장 많은 종중으로써 특히 조선조 의정부 6조 3사의 심의를 거쳐 선정되는 청배리 97분(대전고방에는 253분) 중 우리 선조가 8분이고 이중 궤장을 하사 받으신 21분 중에 우리 할아버지가 3분이다.
우리나라 1830여본 성씨중 청백리나 궤장을 3분 이상 받은 문중은 우리 전의이씨 이외에는 없다.
4. 우리 全義李氏의 淵源
이씨, 김씨의 씨(氏)는 씨, 씨앗이다. 성씨 중에 계통의 종별을 이르든 이름에 붙여 복희씨, 수인씨, 백씨, 중씨라고 하든 씨이다.
우리 전의이씨의 연원을 말하자면 엉뚱하게 중국 당의 승려 주호(朱昊 : 朱瑚)대사의 진양재집(眞陽齋集) 기록부터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진양재 주호대사는 당제국 말의 승려로서 황제의 어명으로 후신라의 정치정세와 산천명당과 민심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밀파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때는 후신라가 등장한지, 그러니까 당군이 조선반도(백제, 신라지역)에서 철수한지 200여년 후의 일이다.
주호대사의 진양재집에 의하면
『건화신미시월(乾化辛未十月)에 금강 나루터에 이르러 성주〔司空 : 사공(舟師 : 주사)〕의 관인한 것을 반갑게 여겨 금강 북쪽 아주 가까운 곳에 산소자리 하나를 지정하여 그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였으니 즉 간좌(艮坐 : 東北間)의 언덕인데 손기병정방(巽己丙丁方 : 巽은 동남간, 丙은 동방)에서 흘러드는 물이 유방(酉方 : 서방)으로 흘러가니 만대(萬代)토록 영귀(榮貴)할 수 있는 크게 발복(發福)할 곳이다.
인선(仁善)을 베푼 사람이 아니고서는 얻기 어려운 묘지이다. 그런데 내가 이방이(李芳伊)의 지극한 효성(孝誠)을 보니 반드시 후에 경복(慶福)을 누릴 것이므로 그 아버지 석재(碩才)를 그곳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이 때가 그해 10월 초9일 축시(丑時)이니 즉 신미년 기해월 임인일 신축시(辛未年己亥月 壬寅日辛丑時)이므로 천문(天文)으로 논하면 지뢰복괘(地雷復卦)이니 7일만에 다시 출발하였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있고, 지리(地理)로 추산(推算)하면 수화미제괘(水火未濟卦)이니 꽃이 아직 활짝 피지 아니한 것과 같고, 달이 아직 완전히 둥글지 아니한 듯한 형상이다. 여기 장사(葬事)지낸지 200年 후에는 자손이 크게 떨칠 것을 하늘이 돕고 땅에서 받들어 줄 것인 까닭에 나역시 그 인효(仁孝)의 덕에 감격하여 기꺼이 지점(指點)하여 주고 기록하노라』하였다. (高宗庚子譜)
예에서 우리는 유의할 바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위 • 진 남북조시대의 혼란한 천하를 재통일한 수문제가 통일의 여세를 몰아 동방, 동북방의 막강세력 고구려를 정복하려다 60만 대병을 죽이고 참패한 후 그의 아들인 폭군 양제가 고구려를 정복하여 설분하겠다고 전후 6차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200여만을 죽이고 참패하였을 뿐 아니라 수제국도 멸망하였다.
가까스로 대륙을 수습한 당고조 이연이 고구려 침공을 두려워 하여 간교한 친선책을 취하더니 양제와 같이 쿠테타로 제위에 오른 당태종이 40만 대군으로 또 고구려를 정복하려다 눈알 빠진 병신이 되어 혼비백산 패주한 후 <고구려군은 도저히 당할 수 없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군은 못 당한다. 모두 철수 하라.>하였다.
그러나 당태종은 죽을 때 까지 계속 고구려를 사방으로 침공시켰다. 적으면 수십명, 보통 수백, 수천, 많으면 수만명씩………이는 피폐전술이요, 정면 공격뿐만 아니라 빙 돌아 측면 후면을 침공시키는 우회전략이었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하고 당태종은 죽었다.
그런데 당고종 때 백제의 공략으로 신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수상 김춘추가 당에 건거가 아들 법민(法敏 : 제2대 계림 도독 : 문무왕)을 인질로 바치고 당군을 끌어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 또한 멸망하여 당의 10대 도독부가 제라지역에 설치되었다.
당의 이이제이(以夷除夷) 전략에 따라 제라유민 25만과 당군 10만으로 9년 동안 고구려를 침공시키다 당군 50만을 동원 남북 85만으로 고구려를 정복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3국지역에 설치한 19개 도독부를 관장토록 하였으니 신라로 인하여 3국이 멸망하고 당제국은 6대 도호부가 완성되었다,
고구려• 백제 유민의 저항이 극심하여 평양~원산 이남의 조선반도에서 당군이 철수하자 제2대 계림도독 법민이 칭왕하여 신라문무왕이요, 통일신라라 이르는 것이다. 이후 신라는 당에 칭신하고 친당책을 취하였으나 <당군 철수 100년이 넘었어도 당은 신라의 정정을 계속 정탐하였다. 이때 밀파된 인물이 주호(朱昊 : 朱瑚)대사였다는 점과> (필자의 사관 직결도ㅓ 밝힘)
그 둘은
삼국을 멸망시키고 계림도독부에서 등장한 통일신라 아닌 후신라가 6대 120여년이 지나자 위로는 왕족들의 왕위쟁탈전, 아래로는 귀족, 관료들의 정권쟁탈전, 토지점탈, 농민착취 등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후신라가 쇠망해 갈 때 각지의 지방관이나 큰 세력(대지주, 대부호)의 호족, 성주들이 많이 등장하였을 때이다.
일본해적 왜구들이 발호하여 국제무역과 침구, 침탈이 날로 자심해 갈 때 이다.(장보고 등장) 수륙양면으로 정치적 • 경제적 요지인 공주(웅진, 웅주, 웅천주) 금강나루의 큰 세력(대실력자• 대부호• 대호족) 자였기 때문에 당제국에 까지 널리 알려져 당제국이 웅진의 세력가 이방이(李芳伊)를 그 세력을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와서 본즉 명불허전(名不虛傳)이고, 뿐만 아니라 인품이 관후하고 인선하며, 적덕하고 포덕함에 감복하여 200년 후에 자손이 번창하고 만대에 걸쳐 발복할 천하 명당 자리를 지점하여 그의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하였다는 점이다.
웅진의 실력자 이방이는 시조 태사공의 100여년전 선대 선조이다. 태사공으로부터 수백년 전부터 웅진의 대부호, 실력자로 수백척의 선박, 대선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태조의 남정에 5만 고려군 호섭(도강)에 공을 세울 수 있었고 전략을 진언하여 대승토록 함으로써 응양대장군으로 발탁되었다. 따라서 성씨가 태사공으로부터 적어도 수백년 전부터 李氏였음이 명백하다.
그러면 태사공 자손 뿐만 아니라 태사공 선대의 선조가 매우 많다는 것도 인지하여야 한다.
전의이씨 천년종사록대로 하면 <뱃사공 자손>이 된다. 시조 태사공의 휘자를 도(棹 : 돗대 도)로 사명(賜名)하였으니 뱃사공 이었다는 무식한 해석을 한다.
棹자를 하사(下賜)한 고려태조의 참뜻은 이나라(고려)의 <돗대>, <노>와 같이 국가 민족의 <지주>, <길잡이(선도자)>, <지도자>라는 가장 우대하는 심오한 것이다.
공신 중의 공신에게 사명까지 하면서 출신을 들추어 사명, 사성을 한 예는 하나도 없다.
그 공을 기리어 사성, 사명하고 시호를 하사한다.
분명히 말씀하지만 역사를 알고,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 해석과 역사 서슬을 해야 한다.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역사를 날조하여 국민을 우롱하고, 누구보다도, 그 무엇 보다도 가장 큰 죄를 짓고, 우리 시조를 <뱃사공>, <뱃사공 자손>을 만든다.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지식과 사관도 없이 역사를 논하고 역사를 쓴다고 오류를 범하고 더할 수 없는 큰 죄를 짓게 된다. (월탄과 작가들) - 비평
웅진의 대호족으로서, 큰 실력자로서 李氏 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많은 호족, 실력자들이 성씨가 없었다. 예를 들면 강주의 윤웅, 백제의 궁창, 명권, 하지현의 원봉, 명주의 순식, 장명, 관경, 진보의 홍술, 명지성의 성달, 벽진군의 양문, 매초성의 능현, 고을부의 능문, 재암성의 선필, 연산의 용직등이다.
그런데 웅진의 실력자로서 李氏 성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 당에 까지 알려졌고 그 인물이 어떤지 조사해 오라 하였음은 3국, 4국시대나 후신라 때 귀족, 관료, 왕족이 아니면 성씨가 없었음을 이해 한다면 후신라 때 선조께서 공신이던 관료이던 어느 왕족이나 귀족이었을 것이란 뜻이다.
여하튼 태사공 선대 수백년 전부터 성씨를 가진 귀족 출신의 실력자였음이 확실하다. 당시에는 귀족이 아니고서는 관료가 될 수 없었고 관료, 귀족 출신으로서 성주, 또는 호족, 실력자, 부호는 삭방의 윤선, 명주의 순식(김순식), 고창군의 김선평, 김행, 장정필, 하곡의 박윤웅 등이 있다.
5. 始祖 太師公
⑴ 고려태조의 정책
후고구려(마진• 태봉) 궁예왕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신숭겸, 배현경, 홍유, 복지겸, 유금필 등이 수상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자 궁예는 미복으로 도망치다 부양(斧壤 : 平康)에서 피살되었다.
고려태조 왕건은 쇠망해 가는 후신라에 대하여 화친• 회유정책을 취하였고, 막강의 세력인 후백제 견훤과는 자웅을 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 강경• 정복정책이 었으니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고려의 동남도 경북일대의 문경, 안동, 상주에서 충돌하고, 서남부의 나주, 광주, 진도, 고부도를 태봉이래로 장악하고, 동남부와 남부의 진주, 마산, 창원, 김해, 절영도에 이어 동래, 울산, 울진에서 려제군이 충돌하게 되니 4면 8방으로 고려군이 포위해와 초조해진 백제의 견훤은 고려와 화친하던 신라 수도 경주를 급습하여 도성, 궁궐을 분탕하고 왕족, 귀족, 백성들을 도륙하는가 하면 경애왕을 포석정에서 자진케 하고 경순왕(金傅)를 허수아비 왕으로 하였다. 이는 후신라에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엇을 것이다.
이어서 중부, 중서부의 충주, 청주, 웅주(공주), 운주(홍성), 황산(연산), 아주(아산)의 격돌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결전장이 되었다.
려제가 진퇴를 거듭하자 일대의 성주와 호족들은 어려움과 희생도 많았고, 고려에도 후백제에도 내부(內附) 〔귀부, 투항(投降)〕가 거듭되고 십여고을이 한꺼번에 투항하기도 하였다.
고려태조는 투항해 온 성주나 호족들을 보장하고, 사성, 사명하고 장군으로 명하여 스스로 그 지역을 지키며 필요에 따라 군사를 동원 큰 작전에 협조토록 하며 봉건국가의 제후를 봉하듯이 교묘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태조의 호족포섭책과 포섭한 호족과의 연합전선 구축은 후삼국을 재통일할 수 있는 묘책이 되었다.
고려태조가 통일전쟁을 전개하면서 귀부(투항)해 온 각 지방의 성주와 호족들 대우, 보장 실례를 들면,
• 태조 원년(918) 삭방의 윤선은 장군,
• 3년 강주의 윤웅, 상주의 아재개도 장군
• 5년 하지현의 원봉은 원윤, 명주의 순식은 사성, 대광, 장명은 사성, 원보, 관경은 대승, 진보의 홍술은 원윤
• 6년 명지성의 성달은 장군, 벽진군의 양문은 원윤
• 8년 매초성의 능현, 고을부의 능문은 원윤
• 13년 재암성의 선필은 장군, 상부, 고창군의 김선평, 장정필, 김행은 사성, 대광, 하곡의 박윤웅과 북미칠부의 훤달은 장군
• 15년 연산의 용직은 대상
• 19년 백제의 박영규는 좌승 등이다.
이들은 반드시 충성을 서약하고 인질(人質 : 其人)을 바치고 자기의 직할지를 지키고, 태조의 군사작전에 협조해야 했으며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처벌을 받고, 인질을 처형하였다. 귀부나 항복을 끝내 거부한 자는 정복하였다.
⑵ 우리시조 太師公의 功績
앞에서 우리시조 태사공 선대의 웅진세거 선조에 대하여 논한 바와 같이 태사공으로부터 수백년 전부터 웅진(공주) 일대에 세거하였고, 웅진의 호족, 실력자, 대부호였기 때문에 웅진, 금강나루를 지배하는 절대권자였기 때문에 많은 선박을 소유하고 있어서 5만여명의 고려대군을 호섭(도강)할 수 있었고,
군략을 진언하여 큰 공을 세우셨기 때문에 응양대장군으로 발탁 임명되었고, 고려태조의 남정에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역할 즉 대첩을 거듭 거두어 큰 공을 세우셨기 때문에 개국익찬공신에 태사에 전산후(후작)을 제수받았다.
1등공신 5분은 처음부터 고려태조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장군, 공신, 대신들로서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던 장본인이요, 2등, 3등공신은 거의 모두가 귀부하거나 항복해 와서 큰 공을 세웠고, 태조의 통일전쟁에 가담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분들이다.
3등공신 왕식렴은 태조의 종제로서 태조를 도와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통일후 30만 북진군을 거느리고 서경(평양)에 주둔했던 고려초 병권을 맡겼던 분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우리태사공은 웅진의 실력자로서 걸출한 명장이요, 삼국통일에 대단한 공적이 있어 2등공신이요, 최고의 공신 삼중대광태사(왕의 고문)가 되셨고, 전산후(全山候)에 봉작되셨음은 고려태조의 봉건제형식의 정치체제하에서는 최고의 대제후에 봉해진 것이다. 공작, 후작은 왕이라 하였다.
고려태조가 승하하기 전 고명대신 박술희에게 명하여 왕위를 이을 후손에게 이른 유훈(遺訓) 훈요십조(訓要十條) 제9조에서 후백제 지역, 후백제인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 <차현 또는 끔강외의 지역은 산형지세가 배역할 형상이고 여기 사는 사람들 인심과 인성 또한 그러한 즉 인재를 등용치 말라>고 한 것은 금강유역 일대의 충청도 지역은 려제의 격전지로서 승패가 반복된 곳이라 어려움과 희생도 가장 많았지만 한꺼번에 십여개의 성(고을)이 후백제에 투항한 적도 있었던 곳이라 경계하도록 한 것 같다.
이에 가장 신뢰하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우리 태사공께서 소백산맥, 차령산맥, 금강일대의 옛 후백제 접경지대를 장악하고, 통치하고, 방어하도록 했던 것 같다.
태사공께서 운주산성, 고산산성, 증산산성 금이성이 삼국시대 이래로 있음에도 이성산에 산성을 수축함도 이 산성에 거주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북한산성, 남한산성과 같이 외성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키 위해서 산성을 축조하였을 것이다.
5개의 산성의 주성으로서 전략을 지휘하기 위해서 산성에 병력을 주둔시키기도 하였다가 만약의 사태(반란, 반역)에 대비하도록 함이 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우리시조 태사공의 공적과 고려태조의 절대적인 신뢰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려태조는 후삼국 통일후 융화정책을 가장 중요한 시책으로 함과 동시에 봉건적 형태의 정치를 하였고, 또 군사, 군국적인 정치를 한 듯 함은 재분열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정치, 관료제에도 군국적으로 나타난다.
우리 태사공 이후의 2~5세조가 정용위대장군, 병부상서(국방장관), 천우위대장군, 형부시랑(법무차관)이 었음도 이를 입증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세력기반으로 여겼던 듯하다.
6. 全山候와 貫鄕 全義
고려개국통합삼한익찬이등공신삼중대광태사전산후이도 시호 성절공(高麗開國統合三韓翊賛二等功臣三重大匡太師全山候李棹 諡號 聖節公)은 우리전의이씨의 시조에게 내린 책훈, 봉작, 관직, 시호이다.
개국익찬공신에 관직이 삼중대광태사인 정1품관이고 후작에 봉하였으며, 성절공의 시호가 내렸다 함이다.
시조태사공께서 이성산에 성을 수축하고 이 산성에 거주하였다. 돈사를 지어 이를 관리하였다는 說도 나오고 있으나 이는 역사를 전혀 모르는 그야말로 무식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중국, 동양, 서양 할것 없이 군왕이나 제후나 성주가 산성에서 거주한 예는 없다. (전시 이외에는)
全山候로 봉하고 전의를 식읍(봉토)으로 하사 하였으니 前述한 바와 같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인 봉토(식읍)와 삼남을 장악하고 제압하여 군주와 수도와 국가를 수호하도록 하였고, 개국공신에 정1품관, 왕의 고문, 벽상공신이었으니 마땅히 수도서울에 거주하셨지만 필요에 따라 식읍(봉토)인 전의에도 낙향하시었을 것이다.
<자손들의 세거지였기 때문에 전의를 관향(본관)으로 하였다>고 족보에 기록되었으나
실은 <전산후>로 봉하였기 때문이고 후세 자손 중에도 전의군, 전산군, 전능군, 전성부원군의 봉작이 5분이나 내린 점으로 보아 <전산후의 식읍>인 <전의>를 관향으로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제, 황후, 왕, 왕비의 묘를 능(陵)이라 한다. 대제후인 공작(황족, 왕족) 후작(황족, 1등공신 중의 한 두명)을 왕이라 하였으니 우리 태사공의 묘를 전산후의 능(陵)이라 해야 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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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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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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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현재 문중의 족보 기록과는.. 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면이 있는 상세한 좋은 자료이나..그렇다면..그것을 어떻게 입증하느냐..하는 문제가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인 듯 합니다..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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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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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이준설씨!! 또 책임지지도 못할 막연 말로서, 본란을 흐리는 군요????
★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현재 문중의 족보 기록과는.. 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면이 있다>에 대하여
⑴ 현재 문중의 족보 기록과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모두 적라라하게 적시하여 주시오????
⑵ 그래야 입증 여부를 따질 것이 아닙니까???? 기대하겠습니다.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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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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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위 본문에서..{우리 문중의 종사록도 마찬가지이며 뱃사공 자손을 만들어 놓았으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였으니..종사록에는 선조가 뱃사공이고..위 본문의 취지는 큰 호족..이라는 것이니..족보기록과는 다르지요..
{고구려를 정복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는데..그 도호부는 평양이 아니고..지금의 단동으로 역사에서 배운 듯 합니다..
{당군을 끌어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 또한 멸망하여 당의 10대 도독부가 제라지역에 설치되었다.}..에서..신라도 망한 듯 하나..배우기로는 신라는 안 망한 걸로 배웠지요..그래서 "후신라"라는 명칭은 생소하다는 것이지요..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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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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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이준설씨!!! <왜 무엇 때문에 말을 돌리십니까????>
1. 종사기록과 족보와 구별을 못하십니까????
2.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책에 <뱃사공>의 기록이 있습니까???
3. 【 현재 문중의 족보 기록과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모두 적라라하게 적시하여 주시오????】에 대하여
★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몇 학년 역사 책 몇 쪽에 어떤 내용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적시를 하지 않고 왜 말을 돌리십니까???
4. 【 {고구려를 정복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는데..그 도호부는 평양이 아니고..지금의 단동으로 역사에서 배운 듯 합니다..】에 대하여
★ 필자 한제공은 그 경력에서 보다시피 역사학자인데, <………배운듯합니다>로서는 아니 되고 어느책 몇 쪽에 보면 <이러이러 하다> 정도로 질문하여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위 이준설씨의 <말돌리기식 댓글>은 없는 것으로 하겠으니 <말돌리지 마시고 >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기록된 <우리 종중의 기록>이나 정확히 열거하시오????
★★★ 그리고 필요하다면 <화벌족>에 대한 문의나 반론은 별도로 하시면 한제공의 답변을 얻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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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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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기록된 <우리 종중의 기록>이나 정확히 열거하겠다는 것이 아니고...위 본문이..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면이 있고..
현재 문중의 족보 기록과도.. 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이지요...즉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현재 문중의 족보 기록과는.. (위 본문이)주요부분에서 서로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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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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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이준설씨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1. 【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기록된 <우리 종중의 기록>이나 정확히 열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면 <우리가 배운 역사교과서에 기록>운운은 뻬버리고 <화벌족>에 대한 말씀만 하셔야지,
왜 자꾸 <역사교과서>운운하여 마치 교과서에 우리 문중의 기록이 있는데, 우리 족보기록과 서로 다른 것인 양 <말돌리기>를 계속하십니까???
2. 다시 한번 말씀드림니다. <역사교과서에 우리문중의 기록이 있다면 정확히 열거하시고,>
없다면 위의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운운한 것은 잘 못 말을 한것이라고 분명히 말을 하고서, <화벌족>에 국한하여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 역사교과서에 우리문중의 기록이 없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운운하며, 우리 족보와 주요부분이 다른 것인양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역사교과서>운운하면서 화벌족의 내용에 관하여 질문하려면, <우리문중의 족보 내용>운운은 아예 빼버리고 <화벌족>의 내용 중 조목 조목 드리대면서 역사교과서 내용과 다르다고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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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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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왜 자꾸 <역사교과서>운운하여 마치 교과서에 우리 문중의 기록이 있는데, 우리 족보기록과 서로 다른 것인 양 <말돌리기>를 계속하십니까?}..라고 하셨는데..
제 말 뜻을 잘 이해를 못하시는 듯 하여..다시 설명드리면..
원문에서 많은 부분이 일반역사에 관해 언급돼 있으니..저도 그 역사를 언급하면서..그런 기록은..학교에서 배운 사실과는 좀 다르다..라고 한 것이고..
나머지 언급인 문중관련 얘기도..역시 족보에서 얻은 지식과는 좀 다르다..라는 것인데..그 말 뜻이 그렇게도 이해가 안 되나요?
학교 역사시간에 우리 문중관련 기록이 있다고 생각함은..큰 오해이지요..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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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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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위와 같은 일반적인 역사관련 글이야 좋은 글이지만..아래에 있던 희옥씨 글은 삭제된 듯 하니..향후로도 돈목을 저해하는 그런 글은 다시는 올리지 마시고..심부름도 하지 마시길..그렇게 하면 징계대상입니다. 매일 서로 만나서 수백번 돈목을 강조해도 모자라는 판에...만났다하면..비방이고..올렸다하면.. 누구는 후손이 없네..하고 정체성 시비니..그래가지고서야..어찌 돈목이 가능할까요..차라리 해체하고말지..죽으나 사나..우리는 일가다..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일념으로 살아가야지..가능하면 덮어주고 보듬어줘야지..생판 남처럼..건수만 생기면 비방이나하고..그래서야 일가가 아니라 남보다도 더 못한 것이지요..이젠 반성 좀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다른 회장이 들어서면 또 그럴지는 모르겠으나..전의쪽 일부에서..큰 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글이라고 할 수 있나요? 온갖 저질 용어는 다 써가면서..일가를 비방하고 있으니..일가라고 해서 그런 비방을 받아도 괜찮나요? 일가간에..잘 못했으면..선배가..타일러서 이런 글은 이래서 잘 못으로 아니 그리 알아라..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확실한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마치 확실히 단정해서 조상을 비하한 듯이 꾸짖으면..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럴 경우 이미 삭제됐으면 다 끝난 것이지..그걸 다시 살려서 비방을 한다는 자체가..말이 안되는 처사라고 봅니다. 설사 그렇게 다시 살려서 꾸짖는 경우에도..부드럽게 타일러야지..그렇게 매섭게... 매정하게 족보를 같이 안하겠다느니..족보에서 파내가라느니..그런 용어를 구사해서 ..참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는 군요..설사 그분이 화수회회장이라고 할지라도 물론 그런 언사를 해서는 안되는데..그런 분도 아니면서..온갖 큰소리를 치시면..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요?
말이 나온 김에 여담 한번 해보면..이건 제 추측인데..고려말에 염씨의 난때..제가 보기로는 권력의 난맥상..즉 월권행위를 한 것인데..즉 반역행위는 아닌데..사회가 어지러우니..마치 반역이라도 된 듯이 매도 당한 듯 합니다만..그 경우 월권했다고 해서 죽일놈 취급하듯이 당한 것이 우리 조상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 경우에도..세도를 심하게 부렸다고 해서..죽일 정도는 아닌 듯 한데..사회가 너무 어지러우니..마구잡이로 매도해서 다 죽이고.. 멸문지화를 당한 것으로 봅니다..(실제로 그때 사정을..양측간의 권력투쟁에서 한쪽이 진 것으로 판단하는 연구기록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선조의 처가쪽인 염씨의 세도로 일어난 사건이기는 하지만..그건..역사기록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한자 즉 약한 자가 받는 설움이니..이긴자의 기록만 남아 있으니 더욱 그런 불리한 기록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실질적인 기록은 모른체.. 일방적인 기록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에 같은 일가간이라고 한들..너무 무서워서..서로를 경계..즉 일가라고 해도 일가가 아니란 듯이 행동해야 살 수 있었던 시절이니..조금이라도 지목을 받아 잘 못한 집안과는 철저히 경계를 하고..그래서 심지어는 족보를 달리하고..족보에서 파내가라는 핀잔도 받을 수 있었던 경우가 아니었겠나..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그런 난리통에 무슨 족보를 같이 하겠다고 할 수 있을까요?..당연히 너희는 우리와는 같은 일가가 아니니..따로 본관을 만들어서 따로 멀리가서 살아라..라는..전후사정이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지요..그래서 그 난리통에 온갖 자료가 다 망실되어..지금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 정도를 대략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명명백백히 모든 것을 밝히며는 좋겠지마는....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무튼 일가간에는 하나부터 백까지..모두 돈목이라는 정신외에 다른 것이 있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그런 정신이 없으면..즉 돈목이 없으면..다 깨어지고..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니..향후로..철저히 돈목에 신경써 주시기 바라고..특히 불곰님이 수시로 언급하는..문장공 후손 관련 언급은..수차 말씀드린 것처럼..별도의 연구위원회를 구성하든가 하여 거기서 얻어진 연구결과에 의해..화수회본부에서 발표하는 것만 우리가 족보 등을 공식적으로 통해서만 얻어진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될 것이고..그 외에 개인적으로..이러저런 자료가 있는데..이상하다..등등 그런 언급은 화수회본부에 직접 건의하여 결론을 얻으시기 바라며..이런 게시판에서 토론할려면..서로 비방은 하지말고..순수 토론차원에서만 해야지..자기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그 반대 주장은 철저히 절멸시킬려는 자세는 향후로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음을 고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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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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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돈목>을 주장하시는 준설씨!!!
1. 돈목을 그리도 주장하시는 분께서는 <돈목>을 깨는 글을 올린 적이 없으십니까??
2. 본 란에는 <화벌족>에 대한 것만 올리는 것이 댓글의 상식 아닙니까???
3. <화벌족>의 댓글에서 <병가상사의 글에 대한 반론의 한풀이>로 오해될 소지가 대부분인 글을 올린 것 같습니다.
4. 준설씨가 <돈목을 깨치는 글>은 절대로 아니 올린 것으로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⑴ 문장공의 孫으로 착대(箸代)하신 제학공의 자손으로서,
① 문장공의 <서자>운운하다가 흐지부지한 것 등
② <9세 전법총랑공(諱 得榮)이 문장공의 양자라는 기록이 있다>는 헛소리를 하고도 증거를 대라는 요구에 한다는 말이 <저작권의 침해우려가 있으니 공개할 수 는 없으니 혼자서 준설씨 집으로 오면 보여 주겠다> 등등
③ 아직 끝나지 않은 사항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5. 예안이씨 대종회 홈피 열린마당 게시판에 올린 내용도 보기에 따라서는 <예안이씨 대종회>와 <회수회본부>간에 밝힐 수 없는 모종의 밀약이 있을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직한 말씀이란 것도 감지하시고 계시지요???
6. 또한 공개된 자유게시판에 올리는 것 또한 자유겠지만, 그만큼 한번 올렸던 글에 대하여는 삭제여부를 떠나서 책임이 있다는 것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7. 그렇게 당당하시다면, 차제에 이러저러한 문제가 제발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고전자료와 논리 정연한 논쟁을 벌려 마무리 짓는 것도 고려해 볼 문제>라는 생각은 아니 드십니까???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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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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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 죽으나 사나 돈목이 기준임을 잊지맙시다..
2. 본 란에는 <화벌족>에 대한 것만 올리는 것이 댓글의 상식이지만..원래 글이 삭제됐길래 할 수 없이 여기다 올렸지요..
3. 다시는 그런 글을 올리지 마시길...
4. 서로가 지적을 하여 그런 사례가 있으면..깨우쳐줘야겠지요..
① 문장공의 <서자>운운해본것은 어디까지나..가정이고..그럴 수도 있다라는 추측인 것을 잘 알 것이고..
전랑공관련 입장은 불변이며..뭐하나 있으면..불곰님은 쉽게 얘기해서 침소봉대하는 듯 해서..말하기가 주저됩니다. 그런 기록은 종사에 위배되기때문에 조용할때 조용히 거론하되..어디까지나 사견으로 봐야겠지요..
5. 밀약은 무슨 밀약입니까? 우리 종보에 이미 다 공개된 것인데..그것 이상은 없다고 보며..보나마나 뻔한 것 아닙니까? 서로 돈목에 저해되는.. 과거 일부 종친처럼 행동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6. 삭제된 것을 가지고.. 책임이 있다하여도..너무 그렇게 집요하게 따져서는 안되지요..
7. 마무리는 우리끼리가 아닌 화수회본부와 같이 해야지..그리고 그런 토론은..조용히 진행해야겠지요..
불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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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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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 이준설씨 헛소리 그만하사고 여기서 멈추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