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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님 보시기 바랍니다 - 김은열 지석의 내용

페이지 정보

休文 작성일10-12-12 17:18 조회5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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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넓은벌 님이 쓰신 글에 대해서 이준설님께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아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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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2010-12-11 11:56
  失傳된 묘소를 찾는 일과 드러나지 않은 사적을 밝혀내는 일은 우리 후손이 꼭 해야 할 일이지만..너무 막연하지요..우선에 우리들의..DNA와..어떤 묘소에서 나온 DNA라도..서로 비교해서..같다는 증명이 된다는 자료가 있어야 될 것으로 봅니다..아니면..그 묘소에서 나온 기록자료가 있어야 되는데..그 자료에 해당되는 것이 1784년 정조대에..경주김씨 김은렬(경순왕의 4째 아들)의 묘지에서 나온 지석에..이첨이 전의이씨라는 기록이 있으니..그거 하나부터라도 제대로 챙겨야겠지요..  
     
 
 이준설
2010-12-11 12:04 아래 235번의 댓글 내용중에..다음과 같은 글이 잇지요...
1784년 정조때.. 경순왕의 아들 중 4남에 경주김씨 시조인..김은렬의 묘소에서 나온.. 묘지석에서.. 김은렬의 빙부(장인)가...이첨이고.. 전의이씨라는 기록이 있었지요...그분이 전의이씨 이첨 어른인데도 지금 족보에서는 누락이 되고 있으니..족보와는 달리 그의 이름이 詹(이를 첨)이고..이첨의 사돈이 신라 경순왕이고..이첨의 딸이 경순왕의 4남(김은열)에게 시집갔다..이첨은 그후 의흥군에 봉해졌다.(의흥은 나중에 이름이 선성<예안>으로 변경됨). }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런 자료가 있음에도 우리 족보에는 이첨이라는 분이 없습니다. 왕건의 사돈이기도한 경순왕시절이면 아마도 시조 태사공의 아들쯤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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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정리해보면, 1784년(정조 8)년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석에 의하면 김은열의 처부(妻父)가 의흥군(義興君)에 봉군(封君)된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첨(李詹)이라는 인물로서 전의이씨 족보에 누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헛점이 있기에
이준설님이 쓰신 내용에 대한 반론을 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은열의 처부(妻父)가 의흥군(義興君)에 봉군(封君)된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첨(李詹)이라는 내용은 1985년 간행된 『경주김씨족보(慶州金氏族譜)』에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김은열의 배위가 전의이씨이며 처부가 의흥군 이첨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근거삼은 것을 김은열의 지석이라 하였습니다.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을 김은열 묘지명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김은열의 지석은 명문(銘文)이 없으므로 묘지명이 아닌 지석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 올바르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묘지명이 아닌 지석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이준설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김은열의 처부가 전의이씨 의흥군 이첨이라는 인물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신중히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실제로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은 그 내용이 소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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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侍中侍郞有高麗平章事殷說卒于戊辰三月初四日己丑葬于城北十里鍾岩下五龍山南麓雙龍合金壬坐之原兄則鎰次鍠次鳴鍾弟曰重錫曰
鍵曰鐥曰鍾子江陵君泰華
번역문 :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설(殷說)이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이 어우러지는 북쪽[壬坐] 언덕에 장례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굉(鍠)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 원문의 번역자는 한림대 사학과 한국사전공 김용선 교수이다.
※ 說이라는 글자가 【설】, 【열】, 【세】, 【탈】 로 발음되는 동자이음(同字異音) 한자인데, 예로부터 경주김씨에서는 金殷說을 김은설이 아닌 김은열로 불리어 왔기에 김용선 교수가 번역한 번역문에서의 김은설은 김은열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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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김은열 지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보시는 바와 같이
이준설님이 이야기 한 김은렬은 김은열(金殷說)을 잘못 말한 것이며, 1784년(정조 8)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에서는 처부(妻父), 즉 장인어른이 전의이씨(全義李氏) 의흥군(義興君) 이첨(李詹)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의흥군(義興君) 이첨(李詹)이라는 내용은 1985년 간행된 경주김씨 족보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전에 기록되지 않던 기록이 현대에 이르러서 그 내용이 추가된 것인데, 그 근거로서 김은열 지석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은열 지석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1784년 발견되었다던 경주김씨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실체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지석의 주인공인 김은열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고려 때의 관직이 평장사(平章事)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석(誌石)에 나타난 위의 기록 외에 『고려사』 등에서 그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와서는 여러 객관적 시각을 통해 김은열 지석이 가짜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림대 사학과 한국사전공 김용선 교수는 그의 글에서,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에서는 가계, 죽은 해, 장례일과 장지, 형제와 아들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 묘지명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있으며 실물이나 탁본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족보에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서 축약되었거나, 발견된 실물이 파손되어 온전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준설님께서는
정확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글을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1784년(정조 8)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金殷說)의 지석(誌石)에서 그의 처부(妻父)가 전의이씨(全義李氏) 의흥군(義興君) 이첨(李詹)이라고 하였는데, 지석에서는 실제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현대에 이르러 간행된 경주김씨족보에 그 내용이 있을 뿐인데 경주김씨족보에 기록된 것도 그 근거삼은 것은 김은열 지석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잘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의이씨(全義李氏) 의흥군(義興君) 이첨(李詹)에 대해서 경주김씨족보에서는 김은열(金殷說) 지석(誌石)으로 떠 넘기듯이 하고, 김은열 지석에서는 그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수레바퀴 돌아가듯이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눈에 들어오죠? 왜 그럴까요?
 
과연 이러할진대 이준설님께서 이야기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기에 확실하지 않은 것은 전의이씨 종인들을 혼란에 겪게 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글은 삼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전산군파(全山君派) 이사(理事) 전성후인(全城后人) 이왕섭(李旺燮)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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