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이 전하지 않는 안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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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벌 작성일10-12-10 12:51 조회306회 댓글2건본문
吾宗의 후손들이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古文書 및 새롭게 발견되는 誌石, 碑文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한다면 뜻밖의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각 도서관에서 족보 및 고문서를 펼치고 선조의 위업을 밝히는 백발의 老宿에게서 숙연함을 느낍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1532년(중종27년)에 16세 병조판서 휘 龜齡께서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태사공 묘소에 碣石을 세워 만세토록 묘역을 알게 한 사실은 매우 칭송받을 만한 대단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失傳된 묘소를 찾는 일과 드러나지 않은 사적을 밝혀내는 일은 우리 후손이 꼭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댓글목록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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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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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失傳된 묘소를 찾는 일과 드러나지 않은 사적을 밝혀내는 일은 우리 후손이 꼭 해야 할 일이지만..너무 막연하지요..우선에 우리들의..DNA와..어떤 묘소에서 나온 DNA라도..서로 비교해서..같다는 증명이 된다는 자료가 있어야 될 것으로 봅니다..아니면..그 묘소에서 나온 기록자료가 있어야 되는데..그 자료에 해당되는 것이 1784년 정조대에..경주김씨 김은렬(경순왕의 4째 아들)의 묘지에서 나온 지석에..이첨이 전의이씨라는 기록이 있으니..그거 하나부터라도 제대로 챙겨야겠지요..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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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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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래 235번의 댓글 내용중에..다음과 같은 글이 있지요...
1784년 정조때.. 경순왕의 아들 중 4남에 경주김씨 시조인..김은렬의 묘소에서 나온.. 묘지석에서.. 김은렬의 빙부(장인)가...이첨이고.. 전의이씨라는 기록이 있었지요...그분이 전의이씨 이첨 어른인데도 지금 족보에서는 누락이 되고 있으니..족보와는 달리 그의 이름이 詹(이를 첨)이고..이첨의 사돈이 신라 경순왕이고..이첨의 딸이 경순왕의 4남(김은열)에게 시집갔다..이첨은 그후 의흥군에 봉해졌다.(의흥은 나중에 이름이 선성<예안>으로 변경됨). }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런 자료가 있음에도 우리 족보에는 이첨이라는 분이 없습니다. 왕건의 사돈이기도한 경순왕시절이면 아마도 시조 태사공의 아들쯤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