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진양재집에 뱃사공(善篙師)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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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작성일24-08-16 20:37 조회87회 댓글0건본문
【1874년 고종갑술보(高宗甲戌譜)】 전서공 파보(典書公派譜)
太師公先山俗傳
山在忠淸道公州錦江北. 壬坎來龍, 卯入首, 艮坐坤向, 丙得水酉破,-以再見再破言之, 則丙得水庚破, 庚得水癸破.-形局則稱以渴龍飮水形, 山名則稱以石傍峴.-돌곁재-
自古傳說, 全義李太師先代, 居住錦江邊, 接濟往來行旅, 施惠甚周廣, 有過去異僧, 來到錦江, 知其爲積德之人, 指示艮穴曰, “葬此則子孫繁延, 錦水不渴, 李氏不絶云云.” 至今近千年, 土人莫不指點爲李太師先山, 盖太師公, 以護涉錦江, 有功於麗太祖, 則太師公之世居公州, 此固可徵, 旣居公州, 則先山之在錦江上, 亦不爲異, 而但太師公, 後居于全義縣雲住山下-卽今所稱, 李城遺址.-, 子孫遂以全義爲姓貫之鄕.
公州山則無文獻取考者, 亦不知太師公以上某代葬地, 故後孫知敦寧府事徵夏, 曾任公州牧時, 治石鐫書, 以‘全義李太師先山’, 欲竪立, 而宗中諸議, 不無異同, 置在塋域之側矣. 今上辛酉年, 徵夏季子德顯, 又爲本州判官, 以爲本土傳說, 其來已久, 終不可歸之疑誕. 乃立前日所置表石于墓前, 仍爲禁伐之地. 今此譜牒重修時, 不可仍無文蹟, 略述傳說根因, 立石事由, 以備日後傳攷.
태사공(太師公 이도(李棹)) 선산(先山)에 관해 민간에 전해진 이야기[太師公先山俗傳]
선산은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금강(錦江) 북쪽이다. 임감방(壬坎方 11시30분에서 12시 방향)의 내룡(來龍)이 묘방(卯方 동쪽)에서 입수(入首)하여 간방(艮方 북동쪽)을 등지고 곤방(坤方 남서쪽)을 향하였으며, 병방(丙方 남쪽)에서 물이 시작되어 유방(酉方 서쪽)으로 빠져나간다.-득수(得水)가 두 개이고 파수(破水)가 두 개인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는 병방(丙方)에서 물이 시작되어 경방(庚方)으로 빠져나가고, 또 하나는 경방에서 물이 시작되어 계방(癸方)으로 빠져나간다.-형국은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이고, 산명(山名)은 석방현(石傍峴)-돌곁재-이라 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전의 이 태사공(李太師公) 선대께서 금강(錦江) 가에 사시며 오가는 나그네들을 구제하여 널리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나가던 특이한 어떤 승려가 금강 가에 이르러 공이 덕을 쌓은 사람임을 알아보고는 간방의 혈(穴) 자리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 지내면 자손이 번성하여 금강의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씨의 대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근 천년이 되었는데도 그 지역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두들 이 태사공의 선산이라고 한다.
태사공이 고려의 태조(太祖)를 호위하여 금강을 건넜으므로 고려 태조께 공이 있었으니, 태사공이 대대로 공주에 살았다는 것이 여기에서 증명되고, 이미 공주에 살고 있었으니 선산이 금강 가에 있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다. 단 태사공이 이후에 전의현(全義縣) 운주산(雲住山)-지금 이성(李城)의 유지(遺地)가 이곳에 있다.-에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전의(全義)를 성(姓)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공주 선산은 살펴볼만한 문헌이 없고, 또 태사공 위로 어떤 대(代)의 장지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후손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징하(徵夏)가 공주 목사(公州牧使) 재임 때 돌을 다듬어 ‘전의이태사선산(全義李太師先山)’이라고 글을 새겨 비석을 세우려했지만 종중(宗中)의 논의들이 일치하지 않아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다. 금상(今上 영조) 신유년(1741 영조17)에 징하의 막내아들 덕현(德顯)이 또 본 고을의 판관(判官)이 되었을 때, 본토의 전설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끝내 의심스럽고 거짓 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예전에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던 표석(表石)을 묘 앞에 세우고 아울러 금벌(禁伐)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보첩(譜牒)을 중수할 때 문적(文蹟)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전설의 근본이 되는 원인과 비석을 세운 사유를 대략 기술하여 훗날 전설을 상고하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참고
내룡(來龍) : 산의 주봉(主峯)에서 묘의 혈까지 연결된 능선이다.
입수(入首) : 주봉에서 뻗어내려온 용맥의 머리가 묘의 혈 자리로 들어오는 부분을 말한다.
득수파수(得水破水) : 물이 흘러들어오는 방향을 득수(得水)라 하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파수(破水)라 한다.
李城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 석축 성곽이다. 이성산성에 대하여는 《동국여지승람》 전의현 고적조에 이성(李城)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으며, 고려시대 이도(李棹)가 이곳에서 살았는데 너비는 1,184척이고 샘이 하나 있고, 석축으로 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도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무찌르게 한 공로가 있는 인물로 전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季子德顯 : 기존 번역에서는 ‘季子德顯’를 ‘막내아들 덕현’이 아닌 ‘계자(系子) 덕현’으로 잘못 번역 되어 있었습니다.
太師公先山俗傳
山在忠淸道公州錦江北. 壬坎來龍, 卯入首, 艮坐坤向, 丙得水酉破,-以再見再破言之, 則丙得水庚破, 庚得水癸破.-形局則稱以渴龍飮水形, 山名則稱以石傍峴.-돌곁재-
自古傳說, 全義李太師先代, 居住錦江邊, 接濟往來行旅, 施惠甚周廣, 有過去異僧, 來到錦江, 知其爲積德之人, 指示艮穴曰, “葬此則子孫繁延, 錦水不渴, 李氏不絶云云.” 至今近千年, 土人莫不指點爲李太師先山, 盖太師公, 以護涉錦江, 有功於麗太祖, 則太師公之世居公州, 此固可徵, 旣居公州, 則先山之在錦江上, 亦不爲異, 而但太師公, 後居于全義縣雲住山下-卽今所稱, 李城遺址.-, 子孫遂以全義爲姓貫之鄕.
公州山則無文獻取考者, 亦不知太師公以上某代葬地, 故後孫知敦寧府事徵夏, 曾任公州牧時, 治石鐫書, 以‘全義李太師先山’, 欲竪立, 而宗中諸議, 不無異同, 置在塋域之側矣. 今上辛酉年, 徵夏季子德顯, 又爲本州判官, 以爲本土傳說, 其來已久, 終不可歸之疑誕. 乃立前日所置表石于墓前, 仍爲禁伐之地. 今此譜牒重修時, 不可仍無文蹟, 略述傳說根因, 立石事由, 以備日後傳攷.
태사공(太師公 이도(李棹)) 선산(先山)에 관해 민간에 전해진 이야기[太師公先山俗傳]
선산은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금강(錦江) 북쪽이다. 임감방(壬坎方 11시30분에서 12시 방향)의 내룡(來龍)이 묘방(卯方 동쪽)에서 입수(入首)하여 간방(艮方 북동쪽)을 등지고 곤방(坤方 남서쪽)을 향하였으며, 병방(丙方 남쪽)에서 물이 시작되어 유방(酉方 서쪽)으로 빠져나간다.-득수(得水)가 두 개이고 파수(破水)가 두 개인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는 병방(丙方)에서 물이 시작되어 경방(庚方)으로 빠져나가고, 또 하나는 경방에서 물이 시작되어 계방(癸方)으로 빠져나간다.-형국은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이고, 산명(山名)은 석방현(石傍峴)-돌곁재-이라 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전의 이 태사공(李太師公) 선대께서 금강(錦江) 가에 사시며 오가는 나그네들을 구제하여 널리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나가던 특이한 어떤 승려가 금강 가에 이르러 공이 덕을 쌓은 사람임을 알아보고는 간방의 혈(穴) 자리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 지내면 자손이 번성하여 금강의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씨의 대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근 천년이 되었는데도 그 지역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두들 이 태사공의 선산이라고 한다.
태사공이 고려의 태조(太祖)를 호위하여 금강을 건넜으므로 고려 태조께 공이 있었으니, 태사공이 대대로 공주에 살았다는 것이 여기에서 증명되고, 이미 공주에 살고 있었으니 선산이 금강 가에 있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다. 단 태사공이 이후에 전의현(全義縣) 운주산(雲住山)-지금 이성(李城)의 유지(遺地)가 이곳에 있다.-에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전의(全義)를 성(姓)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공주 선산은 살펴볼만한 문헌이 없고, 또 태사공 위로 어떤 대(代)의 장지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후손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징하(徵夏)가 공주 목사(公州牧使) 재임 때 돌을 다듬어 ‘전의이태사선산(全義李太師先山)’이라고 글을 새겨 비석을 세우려했지만 종중(宗中)의 논의들이 일치하지 않아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다. 금상(今上 영조) 신유년(1741 영조17)에 징하의 막내아들 덕현(德顯)이 또 본 고을의 판관(判官)이 되었을 때, 본토의 전설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끝내 의심스럽고 거짓 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내 예전에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던 표석(表石)을 묘 앞에 세우고 아울러 금벌(禁伐)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보첩(譜牒)을 중수할 때 문적(文蹟)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전설의 근본이 되는 원인과 비석을 세운 사유를 대략 기술하여 훗날 전설을 상고하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참고
내룡(來龍) : 산의 주봉(主峯)에서 묘의 혈까지 연결된 능선이다.
입수(入首) : 주봉에서 뻗어내려온 용맥의 머리가 묘의 혈 자리로 들어오는 부분을 말한다.
득수파수(得水破水) : 물이 흘러들어오는 방향을 득수(得水)라 하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파수(破水)라 한다.
李城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에 있는 삼국시대 테뫼식 석축 성곽이다. 이성산성에 대하여는 《동국여지승람》 전의현 고적조에 이성(李城)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으며, 고려시대 이도(李棹)가 이곳에서 살았는데 너비는 1,184척이고 샘이 하나 있고, 석축으로 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도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 견훤을 무찌르게 한 공로가 있는 인물로 전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季子德顯 : 기존 번역에서는 ‘季子德顯’를 ‘막내아들 덕현’이 아닌 ‘계자(系子) 덕현’으로 잘못 번역 되어 있었습니다.
【1900년 고종경자보(高宗庚子譜)】 대사성공 파보(大司成公派譜)
太師公先山俗傳
山在忠淸道公州錦江北. 壬坎來龍, 卯入首, 艮坐坤向, 丙得水酉破,-以再見再破言之, 則丙得水庚破, 庚得水癸破.-形局則稱以渴龍飮水形, 山名則稱以石傍峴.-돌곁재-
自古傳說, 全義李太師先代, 居住錦江邊, 接濟往來行旅, 施惠甚周廣, 有過去異僧, 來到錦江, 知其爲積德之人, 指示艮穴曰, “葬此則子孫繁延, 錦水不渴, 李氏不絶云云.” 至今近千年, 土人莫不指點爲李太師先山, 盖太師公, 以護涉錦江, 有功於麗太祖, 則太師公之世居公州, 此固可徵, 旣居公州, 則先山之在錦江上, 亦不爲異, 而但太師公, 後居于全義縣雲住山下-卽今所稱, 李城遺址.-, 子孫遂以全義爲姓貫之鄕.
公州山則無文獻取考者, 亦不知太師公以上某代葬地, 故後孫知敦寧府事徵夏, 曾任公州牧時, 治石鐫書, 以‘全義李太師先山’, 欲竪立, 而宗中諸議, 不無異同, 置在塋域之側矣, 英宗辛酉年, 徵夏季子德顯, 又爲本州判官, 以爲本土傳說, 其來已久, 終不可歸之疑誕, 乃立前日所置表石于墓前, 仍爲禁伐之地. 今此譜牒重修時, 不可仍無文蹟, 略述傳說根因, 立石事由, 以備日後傳攷.
*近見眞陽齋集, 則“淳化辛卯年十月日, 到錦江之津頭, 善篙師之寬仁, 指一穴於江之北至近之地, 許葬其父, 卽艮坐原, 巽·巳·丙·丁之水, 瀉於酉地, 而大抵萬代榮貴大發福之大地, 非假之仁善, 實難得之地. 然而余見李芳伊之至孝, 必有後矣, 故許與之葬其父碩才. 於是年十一月初九日丑時, 乃辛卯己亥壬寅辛丑. 論以天文, 則地雷復, 有七日來復底意, 推之地理, 則火水未濟, 有花未開, 月未圓之象, 葬此二百年後, 子姓大振, 天許地與, 故余亦感其仁孝之德, 許而記之耳.”
朱昊記此說, 與舊譜所載先山俗傳, 盖略相似, 而旣有兩代諱字, 雖非公家文獻不可闕焉, 故今番重修時追錄, 以備後攷.
태사공(太師公 이도(李棹)) 선산(先山)에 관해 민간에 전해진 이야기[太師公先山俗傳]
선산은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금강(錦江) 북쪽이다. 임감방(壬坎方 11시30분에서 12시 방향)의 내룡(來龍)이 묘방(卯方 동쪽)에서 입수(入首)하여 간방(艮方 북동쪽)을 등지고 곤방(坤方 남서쪽)을 향하였으며, 병방(丙方 남쪽)에서 물이 시작되어 유방(酉方 서쪽)으로 빠져나간다.-득수(得水)가 두 개이고 파수(破水)가 두 개인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는 병방(丙方)에서 물이 시작되어 경방(庚方)으로 빠져나가고, 또 하나는 경방에서 물이 시작되어 계방(癸方)으로 빠져나간다.-형국은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이고, 산명(山名)은 석방현(石傍峴)-돌곁재-이라 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전의 이 태사공(李太師公) 선대께서 금강(錦江) 가에 사시며 오가는 나그네들을 구제하여 널리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나가던 특이한 어떤 승려가 금강 가에 이르러 공이 덕을 쌓은 사람임을 알아보고는 간방의 혈(穴) 자리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 지내면 자손이 번성하여 금강의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씨의 대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근 천년이 되었는데도 그 지역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두들 이 태사공의 선산이라고 한다.
태사공이 고려의 태조(太祖)를 호위하여 금강을 건넜으므로 고려 태조께 공이 있었으니, 태사공이 대대로 공주에 살았다는 것이 여기에서 증명 되고, 이미 공주에 살고 있었으니 선산이 금강 가에 있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다. 단 태사공이 이후에 전의현(全義縣) 운주산(雲住山)-지금 이성(李城)의 유지(遺地)가 이곳에 있다.-에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전의(全義)를 성(姓)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공주 선산은 살펴볼만한 문헌이 없고, 또 태사공 위로 어떤 대(代)의 장지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후손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징하(徵夏)가 공주 목사(公州牧使) 재임 때 돌을 다듬어 ‘전의이태사선산(全義李太師先山)’이라고 글을 새겨 비석을 세우려했지만 종중(宗中)의 논의들이 일치하지 않아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었는데, 금상(今上 영조) 신유년(1741 영조17)에 징하의 막내아들 덕현(德顯)이 또 본 고을의 판관(判官)이 되었을 때, 본토의 전설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끝내 의심스럽고 거짓 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며 마침내 예전에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던 표석(表石)을 묘 앞에 세우고 아울러 금벌(禁伐)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보첩(譜牒)을 중수할 때 문적(文蹟)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전설의 근본이 되는 원인과 비석을 세운 사유를 대략 기술하여 훗날 전설을 상고하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근래 진양재집(眞陽齋集)을 보았는데, “순화(淳化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연호) 신묘년(991) 10월 일에 금강 나루에 이르렀는데 뱃사공의 관대함과 인자함을 좋게 여겨 금강 북쪽 가까운 땅에 혈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뱃사공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묘자리는 간좌(艮坐)이고, 손방(巽方 남동쪽)·사방(巳方 남남동쪽)·병방(丙方 남쪽)·정방(丁方 남남서쪽)에서 시작 된 물이 유방(酉方 서쪽)의 땅으로 빠져나가니 이는 만대토록 영화롭고 고귀하며 크게 발복(發福)하는 대지(大地)로 매우 인자하고 선량한 자가 아니면 실로 얻기 어려운 땅이다. 그렇지만 내가 이방이(李芳伊)의 극진한 효성을 보고는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의 아버지 석재(碩才)를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해 11월 9일 축시(丑時)였는데, 바로 신묘년(辛卯年 691년) 기해월(己亥月 10월) 임인일(壬寅日 5일) 신축시(辛丑時, 1시~3시)이다. 천문(天文)으로 논하자면 지뢰복괘(地雷復卦)로 7일 만에 되돌아온다는 뜻이고, 지리(地理)로 미루어보면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로 꽃이 아직 피지 않고 달이 아직 차지 않은 상이다. 이곳에 장사를 지내면 200년 뒤에 자손이 크게 명성을 떨쳐 하늘과 땅이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의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덕에 감동하여 묘자리를 허락하고 그것을 기록한다.”하였다.
주호(朱昊)가 기록한 내용이 옛 파보에 기재된 선산에 관해 민간에 전해진 이야기와 대략 비슷하고, 이미 두 대(代)의 휘자(諱字)가 적혀 있다. 비록 공가(公家)의 문헌은 아니지만 빠뜨릴 수 없었으므로 이번 중수 때 추가로 기록하여 차후 증거에 대비하려 한다.
참고
지뢰복괘(地雷復卦)로……뜻이고 :《주역(周易)》 복괘(復掛卦) 단사(彖辭)에, “그 도를 반복해서 이레 만에 되돌아오니, 이것이 하늘의 운행이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天行也]”라는 글이 있다.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로……않은 상이다. : 《주역》 미제괘(未濟卦) 소주(小註)에, “미제의 때에는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봄이고, 달이 아직 차지 않은 밤이다.[未濟之時 其花未開之春 月未圓之夜乎]”라는 글이 있다.
【해설】 이 글의 앞부분은 지난 글과 동일하고 뒤에 새로운 글이 추가되었습니다. 추가된 부분의 시작 부분에 조판본과 번역본에 각각 문단 구분을 하고 *표시를 하였습니다.
진양재집(眞陽齋集)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뢰인께서 이 문헌이 실제로 존배하는 것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문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석재(李碩才), 이방이(李芳伊) 부자가 등장합니다. 실제 족보에도 이 두 부자가 있는 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958년 무술대동보(戊戌大同譜)】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예안이씨(禮安李氏)의 合譜
太師公先山俗傳
山在忠淸道公州錦江北. 壬坎來龍, 卯入首, 艮坐坤向, 丙得水酉破,-以再見再破言之, 則丙得水庚破, 庚得水癸破.-形局則稱以渴龍飮水形, 山名則稱以石傍峴.-돌곁재-
自古傳說, 全義李太師先代, 居住錦江邊, 接濟往來行旅, 施惠甚廣, 有過去異僧, 來到錦江, 知其爲積德之人, 指示艮穴曰, “葬此則子孫繁延, 錦水不渴, 李氏不絶云云.” 至今近千年, 土人莫不指點爲李太師先山, 盖太師公, 以護涉錦江, 有功於麗太祖, 則太師公世居公州, 此固可徵, 旣居公州, 則先山之在錦江上, 亦不爲異, 而但太師公, 後居于全義縣雲住山下-卽今所稱, 李城遺址.-, 子孫遂以全義爲姓貫之鄕.
公州山則無文獻取考者, 亦不知太師公以上某代葬地, 故後孫知敦寧府事徵夏, 曾任公州牧時, 治石鐫書, 以‘全義李太師先山’, 欲竪立, 而宗中諸議, 不無異同, 置在塋域之側矣, 英宗辛酉年, 徵夏季子德顯, 又爲本州判官, 以爲本土傳說, 其來已久, 終不可歸之疑誕, 乃立前日所置表石于墓前, 仍爲禁伐之地. 今此譜牒重修時, 不可仍無文蹟, 略述傳說根因, 立石事由, 以備日後傳攷.
近見眞陽齋集中, *唐僧朱昊所記云.*
“淳化-元和似是-辛卯十月日, 到錦江之津頭, 善篙師之寬仁, 指一穴於江之北至近之地, 許葬其父, 艮坐原, 巽·巳·丙·丁之水, 瀉於酉地, 大抵萬代榮貴大發福之地, 然而余見李芳伊之至孝, 必有後慶, 故許與之葬其父碩才, 於是年十月初九日丑時, 乃辛卯己亥壬寅辛丑. 論以天文, 則地雷復, 有七日未復, 推之地理, 則火水未濟, 有花未開, 月來圓之象, 葬此二百年後, 子姓大振, 天許地與, 故余亦感其仁孝之德, 許以記之, *僧朱昊記.”*
태사공(太師公) 선산(先山)에 관해 민간에 전해진 이야기[太師公先山俗傳]
선산은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금강(錦江) 북쪽이다. 임감방(壬坎方 11시30분에서 12시 방향)의 내룡(來龍)이 묘방(卯方 동쪽)에서 입수(入首)하여 간방(艮方 북동쪽)을 등지고 곤방(坤方 남서쪽)을 향하였으며, 병방(丙方 남쪽)에서 물이 시작되어 유방(酉方 서쪽)으로 빠져나간다.-득수(得水)가 두 개이고 파수(破水)가 두 개인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는 병방(丙方)에서 물이 시작되어 경방(庚方)으로 빠져나가고, 또 하나는 경방에서 물이 시작되어 계방(癸方)으로 빠져나간다.-형국은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이고, 산명(山名)은 석방현(石傍峴)-돌곁재-이라 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전의 이 태사공(李太師公) 선대께서 금강(錦江) 가에 사시며 오가는 나그네들을 구제하여 널리 은혜를 베풀었는데, 지나가던 특이한 어떤 승려가 금강 가에 이르렀는데, 공이 덕을 쌓은 사람임을 알아보고는 간방(艮方)의 혈(穴) 자리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 지내면 자손이 번성하여 금강의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씨의 대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근 천년이 되었는데도 그 지역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두들 이 태사공의 선산이라고 한다.
태사공이 고려의 태조(太祖)를 호위하여 금강을 건넜으므로 고려 태조께 공이 있었으니, 태사공이 대대로 공주에 살았다는 것이 여기에서 증명 되고, 이미 공주에 살고 있었으니 선산이 금강 가에 있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이 없다. 단 태사공이 이후에 전의현(全義縣) 운주산(雲住山)-지금 이성(李城)의 유지(遺地)가 이곳에 있다.-에 살았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전의(全義)를 성(姓)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공주 선산은 살펴볼만한 문헌이 없고, 또 태사공 위로 어떤 대(代)의 장지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후손인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징하(徵夏)가 공주 목사(公州牧使) 재임 때 돌을 다듬어 ‘전의이태사선산(全義李太師先山)’이라고 글을 새겨 비석을 세우려했지만 종중(宗中)의 논의들이 일치하지 않아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었는데, 금상(今上 영조) 신유년(1741 영조17)에 징하의 막내아들 덕현(德顯)이 또 본 고을의 판관(判官)이 되었을 때, 본토의 전설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끝내 의심스럽고 거짓 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며 마침내 예전에 산소 옆에 방치해두었던 표석(表石)을 묘 앞에 세우고 아울러 금벌(禁伐)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번에 보첩(譜牒)을 중수할 때 문적(文蹟)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전설의 근본이 되는 원인과 비석을 세운 사유를 대략 기술하여 훗날 전설을 상고하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근래 진양재집(眞陽齋集)에서 *당(唐) 나라 승려 주호(朱昊)가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화(淳化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연호)-원화(元和 당(唐) 헌종(憲宗)의 연호)가 옳은 듯하다.-신묘년(991) 10월 일에 금강 나루에 이르렀는데 뱃사공의 관대함과 인자함을 좋게 여겨 금강 북쪽 매우 가까운 땅에 혈(穴)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그곳에 뱃사공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였다. 묘자리는 간좌(艮坐)이고, 손방(巽方 남동쪽)·사방(巳方 남남동쪽)·병방(丙方 남쪽)·정방(丁方 남남서쪽)에서 시작 된 물이 유방(酉方 서쪽)의 땅으로 빠져나가는데 이는 만대토록 영화롭고 고귀하며 크게 발복(發福)하는 땅이었지만, 내가 이방이(李芳伊)의 극진한 효성을 보고는 반드시 후손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의 아버지 석재(碩才)를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해 11월 9일 축시(丑時)였는데, 바로 신묘년(辛卯年 691년) 기해월(己亥月 10월) 임인일(壬寅日 3일) 신축시(辛丑時)이다. 천문(天文)으로 논하자면 지뢰복괘(地雷復卦)로 7일 만에 되돌아온다는 뜻이고, 지리(地理)로 미루어보면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로 꽃이 아직 피지 않고, 달이 아직 차지 않은 상(象)이다. 이곳에 장사를 지내면 200년 뒤에 자손이 크게 명성을 떨쳐 하늘과 땅이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의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덕에 감동하여 묘자리를 허락하고 기록하는 바이다. *승려 주호 기록.”*
참고
간방(艮方)의 혈(穴) 자리를 : 원문은 ‘良穴’로 되어 있지만, 전후의 글에 모두 ‘艮穴’로 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순화(淳化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연호)-원화(元和 당(唐) 헌종(憲宗)의 연호)가 옳은 듯하다.- : 淳化는 북송(北宋) 태종(太宗)의 연호이고 신묘년은 서기 991년이며, 元和는 당(唐) 헌종(憲宗)의 연호이고 신묘년은 서기 811년이다. 본문 내용에 ‘당나라 승려 주호[唐僧朱昊]’라고 되어 있으므로, 순화가 아닌, 원화가 옳은 듯하다고 한 것이다. 이 외의 기사들에서도 원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己亥 : 원문은 乙亥로 되어 있었으나, 전후 기사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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