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조씨 연수원(양진당)의 충효교육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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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술 작성일15-12-01 07:59 조회116회 댓글0건본문
뿌리교육 요람 “풍양조씨 연수원(양진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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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에서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시는 길세 대부님께서
그제 화수회본부에 들렸고 당장 어제 전의 영사재와 상주에 있는 풍양조씨교육원을 가자고 하여 함께 전의 영사재를 둘러보고 길세대부님의 안내로 상주에 있는 풍양조씨 교육원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상주시 낙동면에 위치한 곳 이었다 .
연수원 건물은 養眞堂으로 1628년에 지어진 것으로 □字形건물이었다. 一字形의 대문과 사랑을 들어서면 몸체(正寢)와 곁체(廊廡),층마루(層軒)와 이중방(複房,) 몸체의 양쪽건물(丙室)과 부속건물(子舍)로 이루어져 있다.
이보다 먼저 지어진 悟昨堂과 함께 400여년이 된 건물이다.
우선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우선 마루의 높이가 높다. 1미터 50센치의 높이에 마루가 있다.
이 마루는 본체의 좌측에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 바로 앞에 마루로 연결되는 계단을 있다. 이 계단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다. 각 방마다 창문을 내서 출입이 가능토록 한 것으로 다른 곳으로는 출입구가 없다.
처음부터 후학양성을 위한 교육장으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야 양진당건립의 주목적이 대종가의 祭先廳舍를 마련하는데 있었고 부수적으로 친인척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睦婣 (목인: 친외척간의 화목)과 자제들의 교양을 위한 講堂을 마련하는데도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중간에 위치한 講堂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50여명이 함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마련된 곳으로 비닥이 통마루 판재로 만들어 졌는데 숭의당 마루바닥과 같았다. 본체의 경우 강당을 제외하고는 전부 숙소로 이용되었다. 다시 마루로 나와 우측으로 구부러진 건물 첫 방에 들어가니 사무실이고 그 다음 방은 고문서로 가득찬 모양이다.
이곳에서 1년에 40여명을 교육한다고 한다. 1984년부터 시작하여 32년을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실시하는 교육현황을 살펴보면 이래와 같다.
우선 연수일정을 보면 매면 8월11일부터 15일까지 4박5일로 고정하여 운영한다고 한다.
교육프로그램은 풍양조씨의 유래 및 시조이야기,족보찾아보기 및 가첩만들기, 계촌법과 호칭,생활예절, 제례와제수,인성교육,유적지순례,일반상식,특강,체육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더 사실적으로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다.
연수교육에 참여하는 교육생들은 서로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개별입소하여 연수카드를 작성하고 연수원복과 교재를 수령한 후 간단한 휴식과 저녁식사가 끝나면 강의실에 모여 교무주관으로 자기소개( 출신지역과 파. 항렬, 이름등)를 마친 후 자치회를 구성하여 모든 내무활동을 자치적으로 할 수 있게 분담을 한다.
호칭을 항열에 따라 아제, 형 등으로 부르게 하면 하루 이틀이 지나 보학교육의 영향으로 모두 한 조상 한 자손임을 알게 된다. 또 계촌법을 배워 정확한 항렬을 알면 더욱 친숙해진다. 야간에는 청소년의 문중활동방안,여성의 문중참여,자녀의 가정교육등 그 때 그때의 주제를 놓고 분임토의히며 열띈 토론으로 이어져 늘 잠이 부족하여 시간을 늘려 달라고 말한다. 어디 그뿐인가 ,숙소별로 각 출신지역의 풍물, 역사,지리를 야기하고 인생을 논할 때의 그 진지함을 보면 보람 느낀다. 보학교육10시간, 예절교육8시간, 초청강사특강4시간, 계촌법 및 일반상식4시간, 유적지 순례등 현장교육을 이수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8월15일에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 송룡리 시조묘소를 참배한후 견성암에서 수료증을 수여하고 일정을 마무리한다.
이는 풍양조씨 연수원 30년책자(167~168쪽)내용을 그대로 소개한 것이다.
교육대상은 처음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했으나 지금은 중고대학생,청장년, 부녀층까지 넓혔고 어느 해에는 초등6학년생도 대상이 된 것으로 나타난다.
교육중식사는 양진당 인근 종친부녀자들이 당번제로 식사를 책임진다고 한다.
교육수료자는 제1기(1984년)부터 제30기(2012년)까지1,061명으로 남자678명, 여자 383명이다. 금년으로 현재 32기까지 80명을 더하면 1,141명내외가 되는 셈이다.
재원조달은 처음에는 연수원입소학생들에게 1만원씩 받아서 교육비로 썻다고 하며 지금은 문중에서 2,000만원씩 감당하고 교육을마친 학생들에게 200원의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한해에 나가는 장학금이 8,000만원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수원1년 예산은 교육비 2,000만원, 장학금지급비 8,000만원으로 총 1억원이 된다. 이는 풍양조씨 대종회지원금과 풍육회장학재단의 통 큰 장학금, 각 소문중의 십시일반의 지원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풍육회장학재단장학금은 풍양조씨 각 문중단위 장학금을 일원화하여 지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육을 담당하는 연수원장의 이력을 보면 이 또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다. 제1대원장은 경북자연환경연수원의 자연생태학교장을 역임하신 조성만님이시다. 제2대 조성하님, 제3대 조경희님,제4대 조욱연님 ,제5대 조종구님,제6대 조준희님, 제8대 조성운님, 제8대 조순님(전 한은총재,전 서울시장), 제9대 조재연님, 제10대 조준희님(현IBK기업은행장)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덕망이 있는 분들이 연수원장을 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제1대,제8대, 제10대 연수원장의 이력만을 소개하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 따른 연수원운영회칙이 마련되어 있는데 회칙 제14조에서는 재원에 대해서 자세한 규정을 두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인재육성지원책이 아닌가? 2006년 이미 1,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난다.
참고로 “풍양조씨 30년”라는 책자 표지에는 “ 뿌리를 알면 내가 바로 서고 나라가 바로 선다”고 적고 있으며 이 교육사업은 영구적으로 존속,발전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사업은 양진당에 1984년 풍양조씨 연수원으로 명폐를 달고 본격적인 후학양성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양진당의 경우 최근 국가문화재(보물568호로 등록)로 관리되고 있고 오작당은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경북도민속문화재제32호)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오작당이란 양진당을 짓기 전인 1601년에 지은 건물로 1661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어제를 깨달아 오늘을 살아가는 집이란 의미를 갖는 宗宅이다.
현재 이곳은 양진당을 안내 해설하던 문화해설사 조용권님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여기 참고사항을 부기하고자 한다.
풍양조씨시조는 趙盟으로 고려태조왕건을 도운 고려개국공신으로 서기918년에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의 벼슬과 이름(초명이 바위 였음)을 하사받은 것으로 나타나며 당시 나이70세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묘는 현재 남양주시 진건읍 송룡리 산53-4번지로 견성암(시조가 머물었던 곳) 바로 옆이다.
또 양진당 창건자는 검간 趙靖(1555~1636)선생으로 이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奉常寺正(봉상시정)에 올랐고 1608년 해남현감, 1611~1617 청도군수,1623~25년 김제군수, 1636년 서거, 1642년 이조참판에 증직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養眞이란 ‘나의 타고난 성품을 기름’(養吾眞)을 의미하니 養眞堂이란 ‘본성을 성실히 지켜 자신의 도리에 벗어나지 않도록 교양하는 집’이란 뜻으로 풀이 된다. 이러한 뜻을 寓意하여 1628년 養眞堂이란 편액을 걸게 됨으로써 세칭 양진당이 탄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풍양조씨는 현재 12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과제를 화두로 남기며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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