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발산의 의병장 이용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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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 작성일15-04-10 17:13 조회121회 댓글0건본문
=나주 세지 발산의 의병장 소개=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은 역사상 일직이 유래가 없었던 엄청난 민족적 수난이었다. 이와 같은 국난을 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서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지만, 나주 세지 발산 출신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원균 막하에서 분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수군이 전멸된 다음에는 육전에 참가 남원성에서 장열하게 전사했으나 제대로 논공을 받지 못하다가 후일에야 진실이 밝혀진 흥덕 현감 이용제(후조당) 장군의 행적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후조당 이용제 장군은 전의이공(全義李公) 전성공 사의(全城公 思義)의 후손으로서 1565년 호조참의 쌍벽당(雙碧堂) 담(曇)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셨다.
글에 능하여 서사(書史)에 통하였고, 지혜와 용기가 있어 1591년(宣祖25年) 무과에 등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임명되어 순변사(巡邊使)를 겸하다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군기사 부정(軍器寺 副正)을 거처 임진왜란 3년 후인 1595년(宣祖乙未) 전라도 흥덕 현감(興德縣監)에 제수되었다.
장군이 부임한 흥덕현은 바다에 임하여 수군이 관장하는 전라 우수영에 속해 있었다.
당시의 수사(水使)는 이억기(李億棋)였고, 삼도 수군통제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다.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북상하여 평안도 함경도의 변경에 이르는 국토의 거의 전 지역을 휩쓸었다가,명나라 원군과 국내 각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의 저항으로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밀려가 강화협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동안에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왜군들의 도전은 그치지 않았고 장군이 부임하기 2년 전인
1593년 6월에는 加藤情正(가등청정)小西行長(소서행장) 黑田長政(흑정장정)등 5만의 대 부대가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요충인 진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도 했었다.10일간에 걸친 처절한 격전에서 나주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양산숙(梁山璹),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이 싸움은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란사상 최대의 격전이었다.
장군은 비록 한 고을의 수령이었지만, 전라 충청 경상도의 전 수군이 왜병의 서진을 막아야할 책무를 띄고 있었기 때문에 임지인 흥덕에 머물러 있다기보다는 우수사 이억기 장군을 따라 이순신장군의 통제영이 있는 한산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에 주둔하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4년 동안을 끌던 강화회담이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조건으로 결렬되자 사태는 다시 악화되었다.
1597년 정유년 정월 가등청정, 소서행장,宗義智(종의지), 松浦鎭信(송포진신) 등을 선두로 한 1만4천5백의 왜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왕조실록 정유년 3월8일자는 장군이 참전한 거제 기문포(器問浦) 싸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적이 고성의 배를 타고 북쪽 의로 노를 저으며 도망함에 우리 수군 여러척이 둘러쌓고 자자총통 현자총통을 연발하자 적선의 좌우 방패가 떨어저 나갔다.
화살을 빛발처럼 쏘아대어 왜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 것을 임치 첨사 홍견, 흥덕현감 이용제가 당화전과 관솔에 불을 부처 던져서 태우니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물로 뛰어들어 육지를 향해 해엄 처 나갔다. 활을 쏘아 죽인다음 시신을 거두어 목을 배니 18급이었다.
1597년 7월7일 수군통제사 원균은 2백여 척의 함대를 끌고 출진하다 절영도(絶影島) 해상에서 왜선 1천여 척과 부디 치게 되었는데 원균은 즉각 이를 맞이해 싸우려 했으나 풍랑이 워낙 거세어 더 나아가지 않고 방향을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적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가해왔다. 간신히 적의 공격권에서 빠져나온 주력 함대는 가덕도(加德島)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풍랑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사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육지로 다투어 상륙하다가 숲속에 잠복해 있던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군사들은 싸움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남긴 채 간신히 가덕도 해안을 빠져나와 거제(居濟)의 칠천량(七
川粱)에 기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권율(權慄)도원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원균에게 태형을 가했다.
매를 맞은 원균은 술을 마시고 분을 사기는 도중에 15일 밤 다시 엄청난 적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적들은 수일 전부터 우리 수군을 이기기 위해 면밀한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藤堂脇坂(등당협판)이 수백 척의 전함과 小西島津(소서도진)의 육군,
가등청정의 수군도 합세하여 수륙 양면으로 협공해 왔다.
다급해진 원균은 외부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속절없이 괘멸 되고 말았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여러 해를 두고 이순신이 건설해놓은 무적함대는 아깝게도 고스란 이 수장되고 한산도의 요새 역시 쑥밭이 되고 말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하여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등 역전의 명장들이 모두 전사를 하고 원균역시 목숨을 잃었다.
한산도의 본영으로 돌아온 것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끄는 12척의 함정 뿐 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용제 장군이 어떤 어려움을 격는가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싸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용제 장군은 뒤를 따르겠다는 약간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구례 땅에 이르렀을 때 남원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원성에는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1천여 병력에,
명나라의 보충병 양원(楊元)의 군사 3천, 그리고 6천의 성민이 적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14일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5만의 왜군에 의해서 몇 겹으로 포위된 성은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다. 수성군은 포위망을 분쇄하기 위하여 밤이면 성문을 열고나가 야습을 감행 했다.
장군 역시 수십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사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가 종횡으로 적진을 누비면서 많은 적을 배었다. 그러다가 8월 16일 밤 야습을 나가던 장군은 성 밖에 잠복해 있던 복병에 걸리고 말았다.
왜군들이 열려있는 사문을 통해 물밀 듯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장군은 분연히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군관 전성특(全成特)이 나서며 "헛돼 히 죽느니 잠시 피했다가 후일을 도모 하십시오" 하고
외첫다.
그러나 장군은 "무슨 소리냐? 적을 보고 물러서는 것은 용기가 아니오,
국난에 순절하지 않음은 충이 아니다.
그대는 돌아가 나의 죽음을 알려라" 하고 싸우다가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닫고 의연하게 적의 칼을 받으니 나이 33세였다.
그때 공이 읊었다는 시의 한 구절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나이 나라 위해 몸 바치는 뜻을(男兒殉國志)
석자의 이 칼은 알고 있으리라. (三尺玉龍知)
7년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난중의 유공자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이용제 장군은 유독 그중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유는 거제 해전으로 전멸되어버린 수군에서의 장군의 행적을 추구 할 길이 없었고, 남원 성 싸움에서는 장군이 타처에서 들어와 외롭게 가세한 분일뿐만 아니라 그를 불러들인 이복남 병사를 비롯한 수성군이 모조리 함몰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증거 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점차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영조(英祖) 신유(辛酉)에 도암이재(陶庵李縡)의 주청에 의해서 정려(旌閭)를 명하여 나주 정렬사(羅州 旌烈祠)와 남원 충렬사(南原 忠烈祠)에 향사되기에 이르렀다.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 외팔충비(外八忠碑)에는 수위(首位)로 추앙되어 있다.
전의 이씨 족보에는 손재 박광일(遜齋 朴光一)의 행장(行狀)과 윤득부(尹得孚)의 행록(行錄),목사 임육(任堉)의 행적(行績)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대직계손 삼가 인석(봉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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