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子誠의 아내 淑人 全義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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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익 작성일12-05-25 22:16 조회146회 댓글2건본문
公州牧使 安子誠의 아내 淑人 全義李氏의 生卒年代
三重大匡 全義君 思安의 孫子 副司直 三奇의 사위 공주목사 竹山 安씨의
이름은 自誠이 아니라 子誠(1447~1514)이며, 司直公의 딸(子誠의 아내)은 1449년생이고 1518년에 卒한 것으로 보인다.
安子誠의 墓碣은 1519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찬하였다.
죽산안씨 사과공파 (竹山安氏 司果公派) http://cafe.daum.net/an8414에 한글로 번역된 비문과 탁본이 실려 있다.
이 墓碣은 1519년(중종 14년) 세워졌으며, 그녀가 三重大匡 全義君 휘 思安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다.
댓글목록
休文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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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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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원문 및 번역문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고자료]
전의이씨 : 이좌(李佐)-이삼기(李三奇)-女
죽산안씨 : 안계인(安季仁)-안초(安초)-안자성(安子誠)
이한익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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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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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通訓大夫公州牧使安侯墓碣銘 幷序
正德紀元之九年甲戌八月日。公州牧使安侯卒于官。其孤㥠等。扶櫬歸陽城故里。葬以十一月辛酉。越五年戊寅春。淑人李氏歿。又窆于侯墓之右。相與謀不朽。斯請余銘。而不之辭焉。謹按。安氏之先出竹山。有諱曾。仕爲進賢館直提學。於侯曾祖。直提之子曰季仁。知高陽郡事。孫曰迢。戶曹參判。推其秩。贈及父若祖有差。以其具本御。今略之。司醞直長安德興。以女妻參判生侯。侯旣長。聘司直三奇女。三重大匡全義君思安之後。是爲淑人。內外門闌。皆右姓望族。衮衮簪紳。久而不替。侯之男長卽㥠。漢城府判官。次恒。擧壬子司馬榜。始宦爲參奉。季慥。先侯亡。女長歸慶州府尹柳希渚。登丙辰科。踐淸顯。至今官。次奇迥。捷丙子科。出補茂長。次歸洪繼玄。次歸崔浚。內外孫摠十八人。子孫之慶。其未艾乎。侯由門蔭。積勤謹。歷至三品官。所莅多效績。以廉能稱。在世凡六十有八歲。淑人享壽。視侯與齊而實三年有加。吁。何其全耶。侯名子誠。字勿欺。銘曰。銘曰。
生齊壽死同兆。是其願其亦少。牧守尊子孫多。如侯備有幾何。斯已矣更誰求。于以安永千秋。
정덕(正德) 기원(紀元) 9년인 갑술년(1514, 중종 9) 8월 일에 공주목사(公州牧使) 안후(安侯)가 관아(官衙)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과 사위들이 널을 떠받치고 양성(陽城) 고향으로 돌아와 11월 신유일에 장사(葬事)하였다.
5년이 지난 무인년(1518, 중종 13) 봄에 숙인(淑人) 이씨(李氏)도 사망하니, 또 목사(牧使) 묘(墓) 오른편에 하관(下棺)하였다. 그리고 서로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려고 함께 도모하여 이에 나에게 명문(銘文)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피건대, 안씨(安氏)의 본관(本貫)은 죽산(竹山)이다. 증(曾)은 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의 벼슬을 지냈고, 목사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직제학의 아들 계인(季仁)은 지고양군사(知高陽郡事)를 지냈고, 손자 초(迢)는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니, 그 작질(爵秩)을 미루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증직(贈職)한 것은 차등(差等)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본래 관함(官銜)으로 지금 대략 기록한다.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안덕흥(安德興)이 딸을 참판(參判)에게 출가(出嫁)시켜 목사를 낳았다. 목사는 장성해서 사직(司直) 삼기(三奇)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삼중대광(三重大匡) 전의군(全義君) 사안(思安)의 후손으로, 이 사람이 숙인(淑人)이다. 내외(內外)의 가문이 모두 세력 있고 명망 있는 훌륭한 집안으로, 줄줄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나왔으며 오래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목사의 장남은 바로 서(㥠)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고, 다음은 항(恒)으로 임자년(1492, 성종 23) 사마시(司馬試)의 방목(榜目)에 올라 비로소 벼슬에 나가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막내는 조(慥)로 목사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장녀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유희저(柳希渚)에게 출가하였는데, 유희저는 병진년(1486, 성종 17)의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직(淸顯職)을 거쳐서 지금의 벼슬에 이르렀고, 다음은 기형(奇迥)에게 출가하였는데, 병자년(1516, 중종 11)의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으로 보내져 무장(茂長)에 보임(補任)되었으며, 다음은 홍계현(洪繼玄)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최준(崔浚)에게 출가하였다.
내손(內孫)과 외손(外孫)을 합하면 모두 18인이니, 자손의 경사(慶事)가 한이 없다.
목사는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오래도록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벼슬을 두루 거쳐서 3품(品官)의 관직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본받을 만한 공적(功績)을 많이 남겼고 청렴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향년(享年)이 68세이며, 숙인도 향수(享壽)를 누렸다. 목사와 비교해서 나란히 향수를 누렸으나 실로 3년을 더 살았다. 아! 어찌 온전하지 않겠는가? 목사의 이름은 자성(子誠)이요, 자(字)는 물기(勿欺)이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살아서 목숨을 같이하고 죽어서 한 무덤에 묻혔으니
이것이 그의 소원이었으나 그것 또한 작은 것이라네.
목수(牧守)는 존경을 받고 자손은 번성하니
목사와 같이 갖추어진 이가 얼마나 될까.
이것으로 그만이니 다시 누구를 구할 것인가.
이로써 편안히 만세토록 영원하여라.
정덕(正德) 14년인 기묘년(1519, 중종 14) 11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위 한글 번역본은 죽산안씨 사과공파, http://cafe.daum.net/an8414에서 인용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