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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 성균관 진사 명홍(命弘)님께(예안이씨 고산선생의 서신)

페이지 정보

넓은벌 작성일12-04-25 16:19 조회22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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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산집의 ‘答宗人上舍 命弘’을 번역하여 올립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편지를 주고받은 두분을 곁에서 보는 듯합니다.

  

일가 성균관 진사 명홍(命弘)님께


 지난 번 보내주신 글을 읽고 너무 애석하여 평상심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의 서신을 받고 맑은 의표(儀表)를 다시 접하게 되니, 따뜻한 봄기운을 만난 듯 기쁩니다.

 존체(尊體) 평안하시다니 더욱 큰 위안이 됩니다. 저는 우왕좌왕하며 이 세상에 나이만 또 한 살을 더했으니, 무슨 흥취(興趣)가 있겠습니까?



 우리 종인(宗人)들은 제각기 흩어져 살면서 서로 소식을 주고받거나 내왕이 없었습니다. 저는 늘 이것이 안타까웠는데, 보내주신 자료를 보고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세계(世系)의 의심나는 부분은 그 동안 본 것과 학식이 뛰어난 분들의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전의(全義) • 예안이씨(禮安李氏)가 한 근원(根源)에서 갈라졌다는 견해도 이미 좌의정(左議政) 이명(李蓂)의 신도비(神道碑)에 실려 있고, 또 이후기(李厚基) 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장공(文莊公)께서 예안(禮安)으로 옮겨 봉군(封君)되었다는 설은 달리 사서(史書)에 뚜렷한 문구(文句)가 없고, 또 우리 집안 세계(世系)에도 문적(文籍)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이 없으니, 생각할수록 의문만 더합니다.


 원주(原州)에 살고 있는 예안이씨(禮安李氏)는 평장사(平章事) 이지저(李之氐)를 (예안이씨의) 비조(鼻祖)라고 한다는데, 저들은 그렇게 굳게 믿을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은 저들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아마도 이지저(李之氐)와 제학(提學) 선조께서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대체로 판서공(判書公)께서 고려 말 우왕(禑王) 때 화난(禍難)으로 돌아가시고, 그 때에 익양공(翼襄公) 형제는 모두 어려서 문보(門譜)와 세첩(世牒)마저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일이 천고(千古)의 한(恨)이 되고, 늘 이를 골똘히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길이 멀고, 다시 편지를 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를 대하자 슬픔만이 밀려옵니다.

(원문)答宗人上舍 命弘

前奉未得從容。迨切恨悵。忽承書問。怳如更接淸儀況審春和。尊體履亨泰。尤庸傾慰。樟 支離此世。又添一齒。有何興況。吾宗人各居東西。聞問無緣相接。常以爲恨。蒙尊譁錄委示。何幸如斯。至於世系疑處。此間所見與高明之意無異。全義,禮安。分自一源之說。旣載於李左相蓂之神道碑。又出於李公厚基氏之言。而文莊公之移封禮安。史無明文。又於吾家世系。無籍可記。豈非可疑之甚乎。原州之李。以平章事李之氐爲鼻祖云。彼則固然。而吾門則與彼不同。李之氐與提學先祖。蓋爲一時之人故也。大槩判書先祖受禍於辛朝。竊念其時翼襄兄弟皆幼。門譜世牒。未及收拾。以致千古之恨。每一念至。不覺淚下。道路遼遠。無由更奉。臨楮。不勝悵然。(출전 한국고전번역원, 고산집 )

※ 번역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세히는 모르나 이명홍(李命弘)님은 충북 보은에 살았던 분 같습니다. 많은 관계 자료 올려 주십시오.         문의공-전의부원군-중추원부사공파 후손 漢益 삼가 번역함.


댓글목록

불곰님의 댓글

profile_image 불곰
작성일 12-04-29 19:15

◆◆◆ 넓은벌님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어 고맙습니다.

1. 예안이씨 고산선생이시라면 1675년 <숙종을묘예안보(禮安譜)>를 창간하신 고산공(孤山公: 諱 惟樟)으로서,

2. 그 분께서 디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문이라면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⑴ 세계(世系)의 의심나는 부분은 그 동안 본 것과 학식이 뛰어난 분들의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⑵ 문장공(文莊公)께서 예안(禮安)으로 옮겨 봉군(封君)되었다는 설은 달리 사서(史書)에 뚜렷한 문구(文句)가 없고, 또 우리 집안 세계(世系)에도 문적(文籍)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이 없으니, 생각할수록 의문만 더합니다.

⑶ 원주(原州)에 살고 있는 예안이씨(禮安李氏)는 평장사(平章事) 이지저(李之氐)를 (예안이씨의) 비조(鼻祖)라고 한다는데, 저들은 그렇게 굳게 믿을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은 저들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아마도 이지저(李之氐)와 제학(提學) 선조께서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3. 고산공(孤山公: 諱 惟樟)의 생각(서한문 내용)이 위와 같음에도, 영조 갑신보(英祖 甲申譜→1764년), 순조 임오보(純祖 壬午 譜→1822년), 고종 무술보(高宗 戊戌 譜→1898년), 정해보(丁亥譜→2007년) 등의 내용은 왜 그런 부분이 반영되지 않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4. 넓은벌님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어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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