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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공 에관한 또다른 기록에 대하여..

페이지 정보

樂村 작성일10-02-19 17:32 조회49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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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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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政承混六首


 

混字大初清州 全義縣藉父仟官至大將軍


 

混 忠敬王戊辰丑 承瓘牓丙科位至


 

贊成事 大右文判捴部壬子 以守政丞致


 

仕年六十二卒 于癸丑謚文荘自號蒙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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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彦昇登辛丑科官 至成均樂正先卒無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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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글이 수록된 참고 자료 << 

동인지문오칠 (東人之文五七)

종목 : 보물 제1089호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관판본
수량 : 3권1책
지정일 : 1991.09.3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성출판박물관)
소유자 : 김종규
관리자 : 김종규

이 책은 고려말기 문신이었던 최해(崔瀣,1288∼1340) 선생이 고려시대 선비들의 뛰어난 시문을 뽑아서 펴낸 시선집인『동인지문오칠』가운데 남아있는 권 7∼9이다.최해는 최치원의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는 등 학문에 뛰어났다.성격이 곧고 강직하였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책을 쓰는데 힘써『동인지문』외에도 문집으로『졸고천백』2책을 남겼다.『동인지문』은 최해의『동인지문서(序)』에서 시를 「오칠」, 문을 「천백 」, 변려문을 「사육」이라 하고, 이를 총괄하여 그 제목을『동인지문』이라 하였다.동인지문의 차례는 「오칠」, 「천백」, 「사육」의 순으로 구성되었고 총 권수는 25권으로 되어 있다.『동인지문오칠』은 신라 최치원으로부터 고려 충렬왕 때의 오한경, 홍간 등 시인들의 오언시와 칠언시를 선집하고, 비교와 해설을 붙여 고려말에 간행한 것이다.이『동인지문오칠』은 완질이 아니고 현재 남아있는 것도 전 ·후반부가 없어진 것이 있기는 하나,『동인지문오칠』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오칠」의 구성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일 뿐더러 고려판각본으로서 고려문인의 시가 수록되어있는 만큼 문헌학, 한문학 연구의 자료임은 물론 인물에 대한 전기자료로서의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된다.

(1355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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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문장공 諱 混 에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절요를 통하여 알수있었는바

고려사절요에는  문장공의 아드님에관한 기록이...

李混의 字는 去華요 一字는 太初이니 全義縣人이다 元宗朝에 나이 十七歲로 登第하여 廣州叅軍에 選任되고 들어와서 國學學正에 補하였다 忠烈王 時에 累歷하여 僉議舍人 右副承旨가 되고 副知密直司事 文翰學士 承旨에 승진하여 同知司事를 加하였다 王이 일찍 耽羅民戶를 籍하여 內庫에 예속시키고자 하니 混이 不可하다고 極言하였으므로 王이 즐거워 하지 않았다 때에 近幸이 많이 使命을 받들고 백성을 소란케 하거늘 都堂이 말하기를 「西北界의 사람들은 性質이 暴悍하여 內旨로서 백성을 소란케 함은 不可하므로 이제부터는 마땅히 都評議司에 내려 司에서 都指揮使에 移牒하여도 또한 일을 處理(辦)할 수 있을 것입니다 驛吏가 도망하여 흩어짐은 진실로 傳遽( 驛送)의 번잡함에 말미암음이니 마땅히 都評議司를 經由하여 驛馬를 준 뒤에 行할 것이라」하니 近幸者들이 이를 미워하여 王께 호소하므로 王이 怒하여 巡馬官에게 命하여 堂吏 李紆를 잡아 그 의논을 선창한 자를 심문하니 紆가 말하기를 이 일은 다 내가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王이 더욱 怒하여 萬戶 高宗秀에게 命하여 반드시 정상을 얻고자 심히 고문을 하니 紆가 誣服하여 混을 지적한지라 混을 獄에 내리고 드디어 罷職하였다가 知密直司事 世子元賓으로 起用하여 密直司事 銓曹判書 集賢殿大學士 修國史에 올리고 이어 罷하였다가 다시 判密直司事로 起用하였다가 또 罷하였다 王이 左右에 이르기를 「人臣의 節操가 점점 예와 같지 않도다 옛적에 李混 尹 王缶가 銓選을 맡으매 寡人이 混의 弟 子和를 行首(首班)로 삼고자 하니 混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殿下가 臣으로 不肖라 하시지 않고 銓曹에 待罪케 하고 臣의 弟를 行首로 삼으시면 사람들이 臣을 무엇이라 하겠나이까라고 하였고 또 王缶의 아들 安庇로 權務를 삼으매 王缶가 또한 말하기를 臣의 아들은 나이 어리고 臣이 또한 銓選을 맡았으매 敢히 받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再三 固辭하였는데 지금에 銓選을 맡은 자는 먼저 美官을 親戚에게 주어 寡人이 이를 알지 못하게 하거던 하물며 敢히 사양하겠느냐 이는 廉恥가 날로 없어지고 世道가 날로 떨어지는 所以라」고 하였다 王惟紹 宋邦英을 이미 죽이고 忠宣王이 國政을 오로지할 새 混으로써 僉議侍郞贊成事를 삼았다가 갑자기 中護로 고쳤다 忠宣王이 元에 있어 賀正使로 불러 이르른즉 더불어 選法을 의논하고 다시 官制를 定하였다 이에 密直 重房 內侍 三官 五軍이 모두 罷하게 되므로 失職者가 많이 원망하였다 混이 崔鈞 金元具 權準으로 더불어 忠宣王이 定한 바 官制 및 批判을 가지고 元에서 돌아오니 때에 宰樞들이 慈雲寺에 모였는데 어떤 사람이 匿名으로 投書하기를「中護 李混이 瀋陽王所에 나아가 選法을 의정하여 두 아들을 뽑아 올리고 그 나머지 천거한 바도 親戚과 古舊가 많아서 上을 속이고 私를 行하였으니 任用함이 마땅치 않다」고 하니 混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忠宣王이 돌아오매 미쳐 國事는 모두 藝文館으로 하여금 奏하게 하였으므로 混을 大詞伯으로 拜하고 壁上三韓을 加하였는데 얼마 되지않아 淑妃의 모함한 바가 되어 淮州牧使로 내쳤고 또 禮州牧使로 내쳤다가 召還하여 僉議政丞을 拜하고 致仕하였다 混은 性品이 寬厚하여 일찍 鄭瑎 尹 王缶로 더불어 政房에 있으매 서로 推許하더니 하루는 말하기를「우리들이 사귄지 오랜지라 어찌 서로 허물을 말하지 않으리요」하고 混이 瑎에게 일러 말하기를「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는 교묘하다고 한다」하고 또 王缶에게 일러 말하기를「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는 스스로 높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마땅히 이것을 고칠 것이라」고 하니 瑎가 곧 混에게 이르기를「사람들이 그대는 청렴하지 않다 하니 그런가」라고 하였다 混은 오랫동안 銓選을 맡았으며 性品이 또 청렴치 못한 故로 그 집이 富하매 散産하기를 힘썼고 賓客을 즐리고 琴 碁를 좋아하며 別業(莊)을 城南에 두어 號를 福山莊이라 하고 자주 往來하다가 卒하니 나이 六十一이요 文莊이라 謚하였다 詩文이 淸雅하니 長短句 若干篇이 世上에 行하였다 일찍 寧海로 내쳤는데 바다에 뜬 浮木(査)을 얻어 舞鼓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도록 樂府에 傳한다 아들은 異니 어려서부터 穎悟하여 登第하고 벼슬이 成均樂正에 이르렀으나 먼저 卒하였으므로 아들은 없다...... 

 와같이 아드님 諱 異에관한 기록만 전해지는데  고려사절요(조선시대편찬)보다

 먼저 편찬된 동인지문(고려시대)에는 아드님 諱 彦昇에관한 기록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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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에 子異小穎悟登制仕至成均樂正先卒無子 ( 아들은 異니 어려서부터 穎悟하여 登第하고 벼슬이 成均樂正에 이르렀으나 먼저 卒하였으므로 아들은 없다)로 ..

동인지문에는子彦昇登辛丑科官 至成均樂正先卒無子 (아들은 彦昇이니 신축년에 과거에급제하고 벼슬이 成均樂正에 이르었으나 먼저 卒하였으므로 아들은 없다) 기록이

엇갈리니...


두분이 동일인이신지 ?? . 아니면,

아드님 두분이 모두 子孫이없이 먼저 돌아가신것(先卒無子)인지 ???

 

대종회의 식견이 있으신 일가분들께 고견으로 無知한 後孫의 의혹을 풀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월천이한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월천이한윤
작성일 10-03-15 21:10

좋은사료를 올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시간이 날때마다 연구하여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문장공잘아버지의 자호가 "몽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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