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공할아버지의 새로운 역사기록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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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술 작성일16-10-17 03:49 조회110회 댓글3건본문
이도(李棹)
성명(姓名) |
이도(李棹) |
본관(本貫) |
전의(예안) 全義(禮安) | ||
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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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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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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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履歷) |
이도(李棹) 지역 연기군 구분 충신 시대 고려(하남도) 내용 꿈을 바라본 금강의 뱃사공 이도 이도(李悼)는 전의 이씨의 시조로 원래의 이름은 치(齒)이며, 금강 나루의 뱃사공이었다고 한다. 금강은 충청도 일대를 다른 먼 지역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고, 이 때문에 온갖 짐과 곡식을 실은 배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또 금강으로 단절된 육로를 연결하기 위하여 많은 나루가 발달해 있었다. 이도는 이 금강의 뱃사공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뱃사공보다는 더 큰 인물이 되겠다는 큰 꿈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금강물을 바라보면서 그는 실현성 없는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는 자신의 신세를 자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도의 생각이 반드시 허망한 공상으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 이도가 살았던 시기는 1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신라왕조가 멸망할 무렵이었고, 새로운 질서가 아직 자리잡지 못한, 일종의 혼란기였다. 북쪽의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는 궁예라는 인물이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후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그 힘을 점차 키워가고 있었다. 경주에 자리 잡은 신라는 쇠약하여져 더 이상 이와 같은 혼란을 수습할 힘이 없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해진 시기에는 야심있는 인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었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꿈을 심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고려군이 몰려 온다" 918년 후고구려의 궁예는 폭정을 일삼다가 부하들에 의해 쫓겨나고, 왕건이라고 하는 개성 출신의 장군이 새로 왕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정한 이름이었다. 왕건의 고려는 견훤의 후백제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커다란 싸움을 남겨두게 되었다. 연기군 지역이나 인근의 공주 등 충남지역 일대는 처음에는 궁예의 편에서서 후백제와 대립하였으나, 궁예가 처음과는 달리 점점 폭군으로 변하면서 결국 왕건의 쿠테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점차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이들 충남 지역 일대는 거의 대부분이 후백제 견훤의 편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처럼 충남 일대의 지역은 고려와 후백제의 틈바구니에 위치하여 있었고, 나라의 정세는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고려와 후백제는 자연히 충남 지역 일대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이 힘을 겨루면서 땅을 뺏고 빼앗는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왕건은 우선 천안 지역을 확보한 다음 그 세력을 아산, 예산 등의 충남 서북 지방까지 넓혀갔으며, 계속하여 연기군 이북까지 그 힘을 미쳤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므로, 왕건의 군사들은 더 이상 금강 아래로 내려서지 못하였다. 결국 왕건의 고려군과 견훤의 후백제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막상막하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가 이처럼 팽팽하게 맞선 상황에서 935년 후백제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지도층의 내부 분열로 인하여 견훤이 아들에 의해 익산의 금산사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갇혀있던 견훤은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해 버렸고, 곧 이어 신라의 경순왕도 정세가 이미 고려에 기울었음을 알고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고려에 의한 후삼국 통일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조 왕건의 금강 도하 작전을 돕다 936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에 대한 최후의 대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때의 전투는 경북 선산에서 먼저 벌어졌는데, 이것은 '후백제군을 일단 경상도 지역으로 유인하여 커다란 타격을 준 다음, 다시 대공격을 하여 후백제를 완전히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선사에서의 전투는 고려군의 대승리로 돌아갔고, 왕건은 천안에 남겨두었던 군대를 이끌고 바로 금강까지 치고 내려왔다. 때는 가을, 추수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그런데도 여러 날 큰비가 내려 강물이 크게 불어난 금강물로 인해 고려군은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왕건의 군사가 금강변으로 집결해 있을 때, 이도는 왕건을 찾아가 고려에 협조를 약속하였다. 분열된 후백제에게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를 기대할 수 없었고, 이미 신라까지 고려에 항복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금강과 그 주변의 지리에 밝은 이도는 밤을 틈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배들을 모두 끌어모아 고려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도왔으며, 왕건을 호위하여 무사히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염려하였던 금강을 무사히 건넌 고려군은 논산으로 내려가 후퇴중이던 후백제군을 크게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수십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전쟁은 막을 내리고 고려 왕건에 의해 새로운 통일 국가가 세워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왕건은 마지막 전투에서 이도의 도움으로 무사히 금강을 건너가 후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을 매우 고마워하며 그에게 '도(悼)'라는 이름과 벼슬을 주었다. 여기서 '도'라는 것은 '노를 젓다'라는 뜻으로 뱃사공이었던 그의 도움으로 왕건이 무사히 금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도의 공로로 인하여 그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전의 이씨는 아주 이름있는 가문이 되었다.
이도(李棹) (高麗太祖功臣) 이종문(李宗文) (1566∼1639) 이지영(李之英) (1585∼1639) 이지화(李之華) (1588∼1666) 이지형(李之馨) (1597∼1663) 字는 汝薰 이구(李球) (1620∼1684) 字는 大玉, 號는 隱窩 이시격(李時格) (1638∼?) 字는 正叔 이익필(李益馝) (1613∼1691) 全城世稿(奎5405), 金根重(朝鮮)編. 9卷 6冊 筆寫本(後寫) 30×20.6cm. 全義 李氏 7인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후손 李玄升·李興魯 등이 1897년(光武 元)에 履有齋에서 開印한 것을 筆寫한 것이다. 편집방법은 德行表著, 文武科宦, 文章著述, 狀碣輓祭의 순서로 하였다. 洛浦公에서 霞翁의 七賢은 文集이 있어서 世稿에 넣고, 參奉公(洛浦公의 弟) 이하는 文獻이 없지만 德行·文章·風範·事業이 훌륭하여 수록 하였다. 二可軒 이하 近世祖上은 文集이 있으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싣지 않았다. 狀碣 輓뢰 詩文 雜著는 단지 追先錄 뒤에 집어 넣었다. 한편 諸文字를 聯書해서 行을 바꾸지 않은 것은 世稿로서 구별하려 함이다. 그리고 諱字를 쓸 때 한 칸 낮추어 쓴것은 先錄先集에 대한 尊畏하는 뜻을 두려워한 것이다. 卷頭에는 1897년에 金道和가 쓴 序文이 있다. 卷{1} 追先錄:수록된 사람은 始祖 李棹(高麗太祖功臣)에서 韓末 李根厚까지 50人의 이력을 기록하고 있다. 서술방식은 諱(初諱가 있는 경우는 初諱 竝記), 字·號·族系 및 그에 관한 記錄類(墓誌 墓碣 墓表 詩文 雜著 遺事), 行蹟, 科宦, 學問, 子女, 文集의 有無 등을 기록했다. 「追先錄」 序頭에는 "家傳忠孝 世守仁敬"이라는 八字를 書寫해 놓았는데 이는 世宗이 孝靖公에게 써 준 것이다. 그러나 「追先錄」의 일부는 佚失되어 傳하지 않으므로 그 없어진 부분에는 白紙를 끼워 놓아 이를 표시하고 후세에 補正되기를 기약하고 있다. 또한 附篇이 있어서 本世稿의 편집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卷{2}:洛浦集. 李宗文 (1566∼1639)의 문집. 薦補로 司憲府監察 三嘉縣監 比安縣監 陽城縣監 軍威縣監 등을 역임. 詩 4首와 附錄으로 霞??亭題詠, 霞??亭創修顚末, 孫慕堂寄贈, 輓詞, 大丘輿地勝覽忠義門, 輿地勝覽改正草本, 星州邑誌修草本, 墓碣銘, 淑夫人全氏墓誌銘, 仙査船遊圖錄 등이 수록. 卷{3}:水月堂集. 李之英(1585∼1639)의 文集. 1613년(光海君 5) 文科에 合格한 후 成均館學正 成均館典籍 禮曹佐郞을 역임. 1620년 聖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 후 戶曹佐郞 成均直講에 임명되었으나 光海朝에 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仁祖反正으로 다시 官界에 나와 北靑判官 戶曹佐郞 蔚珍縣令을 역임. 年譜와 詩 2수(附 舍弟詩), 祭文 2편(祭朴摠管忠後文 祭樂齋徐先生文)과 附錄으로 諸賢投贈 3수, 輓 3수, 書 2편, 記 1편(濯臺精舍記), 墓誌文 1편(曺挺立書), 墓碣銘 2편(任有後 許穆撰), 家狀 1편(李之華書), 淑人金氏誌文(曺挺立撰) 등이 수록. 卷{4}:茶圃集. 李之英의 동생 李之華(1588∼1666)의 문집. 字는 而實, 號는 茶圃, 또는 浮江居士. 張旅軒 徐樂齋의 門人. 1610년 進士試에 合格. 1613년 文科에 합격. 藝文館檢閱 成均典籍 兵曹佐郞 禮曹正郞 司諫院正言 등의 관직을 역임. 正言으로 있을 때 權奸 李爾瞻을 공격하다가 해를 입어 낙향. 仁祖反正으로 다시 정계에 나아갔으며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張旅軒을 따라 義兵을 일으켜 주로 軍餉의 일을 맡아 보았다. 그 후 刑曹佐郞 戶曹正郞 工曹正郞 醴泉郡守를 역임. 丙子胡亂 때에는 湖西地方에서 義兵을 모집하였다. 그 후 坡州牧使 金海府使 昌原府使 兵曹參議 定州牧使 咸陽郡守에 임명. 1654년(孝宗 5) 寧海府에 귀양. 茶圃集 上:李根弼의 序文, 年譜, 詩 34수, 書 5편, 祭文 1편(祭旅軒張先生文), 箚啓 2편(箚論日本奉使不稱 등), 賦 2편, 策 1편, 雜著 1편(春秋祀禮定式), 家狀 1편. 茶圃集 下:附錄으로 大丘輿地勝覽, 與地勝覽改正草本, 星州邑誌(以上家兄 李之英 同纂), 徐樂齋通講錄草本, 墓碣銘幷序, 行狀, 輓詞 6수, 浮江亭上樑文(澤堂 李植撰), 同道會帖議, 遊浮江亭有感(慕堂先生 등 撰) 17수, 家狀 등. 卷{5}:積城公集. 李宗澤의 아들. 李之馨(1597∼1663)의 문집. 字는 汝薰. 1633년(仁祖 11) 進士科에 合格, 直長 楊州鎭管 積城縣監을 역임. 詩 1수, 挽 3수(輓崔竹軒恒慶 輓徐東皐思選 輓都鋤齋汝兪), 附錄으로 栢浦 蔡楙의 輓 1수, 家狀 1편, 墓碣銘 1편(李尙眞撰), 墓誌銘 1편(李元禧 등). 卷{6}:隱窩集. 李之英의 아들 李球(1620∼1684)의 文集. 字는 大玉, 號는 隱窩. 1646년 司馬試, 1652년 文科에 合格. 成均學諭 博士 典籍과 司憲府監察 順天府使 泰安郡守 襄陽府使 成川府使 司諫院司諫 吉州牧使 등의 관직을 역임. 詩 37수, 輓 23수, 長篇 6수, 祭文 2편, 說 1편(戱答柳學源仁洙), 雜識 1편(南宋高字), 書 2편, 附錄으로 輓 6수, 行狀 1편(朴光錫書), 墓碣銘 2편(李家淳, 7代孫 玄升書)등. 卷{7}:江皐集. 李時格(1638∼?)의 문집. 字는 正叔. 39세 되던 해에 武科에 급제. 高原 海美 碧潼 三郡의 수령을 지냈다. 品資가 通政大夫에 이르러 歸鄕하였다. 江皐集 上:詩 90수. 江皐集 下:書 4수(答或人書 答馝兒書 등). 附錄으로 星州邑誌, 輓詞 25수, 家狀 1수, 諸賢投贈 6수, 墓碣銘 1편. 卷{8∼9}:霞翁集. 李益馝(1613∼1691)의 문집. 29歲에 別試 武科에 及第. 訓鍊院僉正 平海郡守 五衛將 竹山都護府使 驪州牧使 全羅左道水軍節度使 등의 관직을 역임. 1678년 禁衛右別將으로서 李麟佐亂 討平에 참가. 그 후 鎭川縣監을 除授받고 輸忠竭誠奮武功臣이 되었다. 그 후 平安道兵馬節度使 春川都護府使 吉州牧使 등 고위관직을 역임. 霞翁集一 上:李鍾祥의 序文, 詩 120수, 序 1편(紅蓮庵題名錄序), 祭文 2편(祭金霽山聖鐸文 祭再從姪紀伯文), 跋 1편(詩集跋). 霞翁集 下:黃猿日記. 그가 禁衛右別將으로 李麟佐亂 討伐을 나갔을 때의 日記로 3月 14日부터 7월 28일 까지의 기록이 소상하게 남아 있다. 이 日記는 李麟佐亂 硏究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霞翁集二 上:附錄으로 그가 李麟佐亂 討平의 功勳으로 받은 賜勳府諭諸勳臣 冊書鐵券文, 戊申(1668) 3月 1日傳, 庚寅(1710) 正月二十八日 傳이 실려 있고, 下에는 그의 行狀 神道碑銘 畵像贊 謚狀 家狀 賜祭文 2편, 輓 7수, 祭文 8편. 卷末에는 金興洛의 文集 跋文과 後孫 李種杞의 後記가 실려 있다. | ||||
묘(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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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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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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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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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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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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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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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
1. 전의이씨 한자 全義李氏 영어 음역 Jeonui Yissi 영어 의미역 Jeonui Yi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시대구분 없음 집필자 김학수 세거지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유곡리 석포|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입향시기/연도 1400년 전후 성씨시조 이도(李棹) 입향시조 이승간(李承幹) [정의] 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연원]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李棹)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이도의 초명은 치(齒)이며 시호는 성절(聖節)이다. 본래 공주에 세거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금강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강을 건너게 했다. 그래서 태조로부터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統合三韓開國翊贊) 2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고 전산후(全山侯 )에 봉해졌다. 그 후 전의(全義) 이성산(李城山) 아래로 이거(移居)하여 정착 세거하니 후손들은 본관을 전의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입향경위] 조선 초기에 이승간이 하륜의 사위가 되었는데 경상우도 도절제사로 우도를 순찰할 때 진주의 병영에서 갑자기 순직하여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대포리에 장사지냈다. 이를 계기로 진주에 입향하게 되었다. [묘역] 시조의 묘소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 3일과 10월 2일이다.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인 이도의 후손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그 중 이혼(李混)은 시조의 7대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이익(李翊)이 예안(禮安)으로 분적하여 예안이씨로 불리어 왔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이씨와 통합하였다. 이언충(李彦沖)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이천(李阡)의 손자로서 충렬(忠烈) · 충선(忠宣) · 충숙(忠肅) · 충혜왕(忠惠王)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이정간(李貞幹)은 이언충의 재종손으로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으며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 및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진주문화원, 1991)
2. 전의이씨(全義李氏) 역대주요(歷代主要)인물(人物) ▲고려조(高麗朝) 이도(李棹)(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시조(始祖)) 이천(李仟)(중서시랑(中書侍郞)) 이황(李滉)(첨의정승(僉議政丞)) 이익(李翊)(제학(提學)) 이언충(정당문학(政堂文學)) 이사경(李思敬)(병마부사(兵馬副使)) 이송(전법판서(典法判書))
3. 이도(李棹)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全義李氏族譜(奎53), 李德容(朝鮮)編. 10卷 10冊 古活字本 38.4×25.6cm. 四周單邊 半郭:32×19.5cm. 13行 31字 注雙行. 版心:上下白魚尾. 序:이린(李麟) 이해수(李海壽) 이명준(李命俊) 이후기(李厚基) 이만배(李萬培) 등. 跋:이만해(李萬楷) 이징복(李徵復) 이덕용(李德容). 1754년(英祖 30)에 이덕용(李德容)이 간행한 전의이씨족보(全義李氏族譜)이다. 전의이씨는 1574년(宣祖 9)에 처음으로 족보(族譜)를 간행하였고, 그뒤 1634년에 중간(重刊)하였다. 이후 수보 작업은 1711년에 초본(草本)이 완성되었으나 간행되지 않았고, 다시 이덕용(李德容)의 부(父)인 이징국(李徵國)이 맡아 1740년∼1750년 사이에 일단 초본(草本)을 완성한 후 인쇄(印刷)에 들어가기 위해 베끼던 중 1752년 이징국(李徵國)이 죽자 그의 아들인 이덕용(李德容)이 족보간행 사업을 맡아 이징국(李徵國)이 정리한 초고(草稿)를 중심(中心)으로 더 보충하여 1754년 11월 126질(帙)을 간행(刊行)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머리에 범례(凡例)·구서발(舊序跋) 및 신서(新序)·사적(事蹟)이 있고 {권1∼10} 및 별보(別譜)가 세계도(世系圖), 책 끝에 발(跋)과 인쇄관계 기록이 있다. 구서(舊序)는 성화초보서(成化草譜序)(1476년 이린李麟), 만력구보서(萬曆舊譜序)(1574년 이해수李海壽)·跋(1575년 안로安로), 숭정구보서(崇禎舊譜序)(1630년 이명준李命俊)·跋(1631년 신익성申翊聖), 숭정갑무간보후단발(崇禎甲戊刊譜後短跋)(1634년 이후기李厚基) 등이고 중간신보서(重刊新譜序)는 이만배(李萬培)(1750년)와 이정작(李庭綽)(1754년)이 쓴 것인데 이만배(李萬培)의 서(序)는 이징국(李徵國)이 편찬을 끝냈을 때 쓴 것같다. 「사적事蹟」은 이혼(李混)전(傳)(高麗史 발췌), 이아(李雅)의 묘지(墓地)(崔瀣 撰, 東文選 수록), 이시보(李時珤)의 墓碣(李陸 撰), 전의이씨본원(全義李氏本源), 문장공기질문의공시(文莊公寄姪文義公詩), 효정공경수시후발(孝靖公慶壽詩後跋)(이계복李繼福 撰 및 1574년 족보 간행시 이해수李海壽의 所述), 孝靖公(이정간李貞幹) 송천서원행록(松泉書院行錄), 淸江公(이해수李海壽)與安公(로) 書(1575년, 이해수李海壽의 子 이제신李濟臣), 청강공자손보서략(淸江公子孫譜序略)(朴世堂 撰), 성관향전의현인물(姓貫鄕全義縣人物)(輿地勝覽 발췌), 전의현건치연혁(全義縣建置沿革), 태사공(太師公)(始祖 이도李棹)先山俗傳, 선대사적관직연대고계(先代事蹟官職年代考稽), 견려사(見麗史)(4인), 입명신록(入名臣錄)(6인), 입황각록(入黃閣錄)(3인), 선문형록(選文衡錄)(1인), 선청백리안(選淸白吏案)(4인), 입기당안(入耆堂案)(3인), 참공신록(參功臣錄)(6인) 등을 모은 것이다. 세계도(世系圖)는 {권1∼10}의 원보(原譜)와 별보(別譜)로 구분되어 있고 원보(原譜)는 매권 上·下로 나뉘어 있다. 전의이씨(全義李氏)는 8世祖가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데, 즉 8世 3兄弟 中 둘째인 이혼(李混)를 중심으로 예안(禮安)으로 분관하였기 때문에 이자원(李子원)과 이자화(李子華)를 중심(中心)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자원(李子원)을 기준으로 하여서는 {권1}上에 그의 7代孫(15世)까지, {권2,3}에는 7代孫이하 14代孫(15世이하 22世), {권7,8}에 14代孫이하가 수록되고, 이자화(李子華)를 기준으로 하여서는 {권1}下에 그의 7代孫까지, {권4∼6}에 7代孫이하 14代孫, {권9}에 14代孫이하가 수록 되었다. {권10}에는 구보(舊譜)에 무후(無後)라 되어 있는데 보단자(譜單子)를 보내왔으나 그 증거를 확인(確認)할 수 없는 경우, '무후(無後)'라 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전의 족보(族譜) 편찬(編纂) 때 계속 수록되지 않고 또 그 계보를 증명(證明)할 기록이 없는 경우 등을 따로 분리하여 수록하였다. 별보(別譜)는 분파(分派)한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전의이씨(全義李氏)임을 확실하게 알 수 없을 경우, 또는 구보(舊譜)와 다른 보단자(譜單子)를 보내 와 어느 것이 옳은지 판별할 수 없는 경우로, 5개派가 수록되어 있다. 권말(卷末)에는 신묘초발(辛卯草跋), 신보발(新譜跋), 인역시종중임장원(印役時宗中任掌員) 등의 기록(記錄)이 있다·「신묘초발辛卯草跋」은 1634년의 수보발간(修譜發刊) 뒤 1694년에 또 당시 수보작업(修譜作業)이 시작되어 1711년에 초고(草稿)를 완성하면서 붙여진 것으로 이만해(李萬楷)가 쓴 것이다.「신보발新譜跋」은 1754년 이징복(李徵復)과 이덕용(李德容)이 쓴 2편이 있는데, 특히 이덕용(李德容)은 1694년에 시작된 수보작업(修譜作業)이 1711년의 초고완성(草稿完成)으로 매듭지어지지만 간행되지 못하고, 이후 1754년의 발간(發刊)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발(序跋)을 통해 주목되는 점은 전의이씨의 겅우 수보(修譜)의 기간을 주갑(周甲)을 단위로 한 것이다.「인역시임장원印役時任掌員」은 그들의 소생(所生)과 인역(印役)을 감독한 일수(日數) 등을 적었다. 이 기록 끝에는 족보발간(族譜發刊)을 계기로 인보역물재소(印譜役物財所)의 수입·지출을 회계(會計)하고 있다. 세계도의 체제나 내용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세계도(世系圖)의 형식은 8층도(層圖)이다. (2)선남후녀법(先男後女法)에 따르되 서파(庶派)는 수록하지 않았다. (3) 양자(養子)의 경우 구보(舊譜)는 소생처(所生處)에 기록하였는데 본보(本譜)에 이르러 소생처(所生處)에는 "출계(出系)"라 표시하고 소생처(所生處)에 "계자(系子)"로표시 수록하였다. (4) 구보(舊譜)가 女서만 수록하였음에 비해 외손(外孫)까지 수록하였다. | ||||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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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학수님은 1967년생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고문서연구구실장으로 재임하엿으며 동 연구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한 분입니다. 진주목읍지와 전성세고를 참고로 이글 을 집필한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934년 금강을 도강하여 운주성( 홍성)싸움참가기록을 전면 수정한내용으로 우선 공주학에 편입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할 것입니다.우리 일가들이 동 내용을 더 발전심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준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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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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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맨 위에..[이도(李悼)는 전의 이씨의 시조로 원래의 이름은 치(齒)이며, 금강 나루의 뱃사공이었다고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공이란 구절은..족보에는 이치의 조상 이방이가 사공이었다고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는데.. 전의예안이씨화수회본부에서는 '시조 이치가 원래는 사공'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금강주변 호족(지방의 거대 가문:명문거족)..즉..지역의 최고 유지로 해석하면 좋겠지요.
이병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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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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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사실 준설일가님의 지적에 공감합니다. 다만 제3자적 기록은 중요한 것으로 그러한 지적을 고쳐 소개할수없는 한계를 양해해주시기바랍니다. 향후 나말여초의 지방호족에 대한 기록들을 통하여
태사공할아버지의 신분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