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도시 공주 ( 고려 태조왕건과 공신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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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술 작성일16-09-23 09:22 조회138회 댓글1건본문
(365-170층탑석) '왕의 도시' 공주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상왕산록 우전차를
큰샘물로 우려내어
로 시작하는 웅진공주가 입니다.
지난해 만들었던 공주가에서
몇구절 빼는 대신 차를 내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용은 좋을지 몰라도
글자가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
현대인들의 급한 심성에 덜 맞다
하는 조언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추가한 것이 있습니다.
공주에는 오년여 전 웅진동 한옥마을에
뜻있는 인사들이 마음을 모아서
공주를 다녀간 고려와 조선의 왕을
기리는 석비를 세운 것이 있습니다.
고려때는 현종임금이 거란의 침략을 피해
나주로 가는 길에 공주에서 며칠 머물렀고
조선 때는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쳐 와서 공산성의 쌍수 나무 아래
고단한 몸을 쉬다가 난이 진압되었다
는 소리를 들었다 합니다.
두 왕이 모두 난리를 피해
어가를 움직인 것에 반해
공주에 왕이 행차를 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상대를 정벌하기 위하여
지나간 분이 바로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태조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견훤을 물리치러 남하하던 중
공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 나 도강을 하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그 때 공주에 배를 가지고 있던
이치라는 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왕건의 부대가 안전하게 도강을 하도록 도왔고
왕건은 그 공을 높이 사서
이치의 이름을 이도李棹로 고치게 하고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삼았다 합니다.
현종이나 인조 보다는 왕건의 공주 행차가
더 의미있는 일이 될 수 도 있겠다 싶어
웅진백제 오대왕 뒤에 고려왕건과
공신.이도 를 추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훗날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일부 왕씨들이 공주의 상왕동으로 숨어 들어와
몸을 숨기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어찌 되었든 공주는 고려 왕건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개성이나 평양 한양등 무수한 왕들이
살았던 수도에서는 굳이 몇명의 왕 이름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겠지만
웅진 백제 오대왕 이후로 왕건과 현종 인조가
공주를 다녀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종 인조를 이야기할 때 왕건도 같이
말해 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추가한 것입니다.
아무리 허름한 집도 임금이 하루 머물다 가면
귀한 집이 되는 것이란 이야기를
숙종과 갈처사 이야기에서도 살펴 보듯이
왕들이 다녀간 공주는
가히 '왕의 도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어가를 옮기면
파천 또는 몽진이라 하고
머물고 떠난 곳을 주필지라 유식하게 말하는데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현종과 인조는 엄밀히 말하면
왕성을 버리고 도망친 모양새이고
왕건은 삼한일통을 위한 공주의 통과이므로
기왕지사 세워놓은 현종 인조 기념비 옆에
왕건의 비도 추가하자 하는 의견도 내봅니다.
비 오시는 날 중얼거림은 이 무슨 뜻인가요.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나무석가모니불
댓글목록
이병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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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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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원효사는 공주시내 우금티터널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절입니다. 이곳 주지스님 해월스님께서
태사공이도 할아버지 업적을 고려태조왕건과 함께 게재하는 문구를 웅진공주가에 넣고 한편,
공주한옥마을에 태조왕건비를 세우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비를 세우게 되면 당연히 그 비문에 태사공할아버지의 업적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해월스님의 전화는 011-9808-233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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