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이 천(李 蕆): 1376-1451 자(字) 자현(子見),호(號)  백곡(栢谷), 또는 불곡(佛谷), 시호(諡號)는 익양(翼襄)이다. 태종 2년(1401)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동 10년(1409)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거듭 급제(及第)하여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경상도전절제사(慶尙道조戰節制使)를 역임하였으며,세종 원년(1418) 대마도 왜구정벌에 공을 세워 충청도병마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가 되었다.공조 참판(工曹參判),병조판서(兵曹判書)를 맡아 군사,국방분야와 과학기술 분야를 두루 발전시겼고 동 16년(1433)에는 경자자(庚子字)보다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이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인쇄되었다. 악기도감 제조(樂器都監 提調)로 박연과 함께 금, 솔, 대쟁, 아쟁 등의 악기를 만들어 음율이 맞도록 하였으며, 군기도감 제조(軍器都監 提調)를 맡아 병선 건조(兵船建造)와 새로운 병기를 개발하고, 간의대 제조(簡儀臺提調) 재직시에는 대간의(大簡儀), 소간의(小簡儀), 혼의(渾儀), 앙부일구(仰釜日晷)등 천문기기와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하였다. 동 19년(1436)에는 평안도 도절도사(平安道 都節度使)로 북방(北方)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들을 정벌하여 4군을 설치하여 북방경비를 튼튼히 하였다. 동 31년(1448) 숭록대부 판중추원사(崇祿大夫判中樞院使)에서 보국숭록대부(輔國 崇祿大夫)로 승차(陞差)되고 왕이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문종 원년(1450) 향년 76세로 별세하자 익양(翼襄)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육군사관학교에서 공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하여 익양관(翼襄館)을 건립하였으며, 2003년 2월 20일 우리나라 과학사에 남긴 획기적인 업적을 기려 한국과학기술인(韓國科學技術人) 명예(名譽)의 전당(殿堂)에 과학자 14人을 모셨는데 그중 한분이다.

 

이 온(李 韞): 1382~? 태종 원년(1401) 조선조 최초의 과거(科擧)인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호군(護軍),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세종 24년 (1441)에 통정대부 군기감정(通政大夫 軍器監正)를 역임하였다.  증손(曾孫)인 이명(李蓂)이 좌의정(左議政) 에 오르게 되어 명종21년(1565)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追贈) 되었다.

 

이효로(李孝老): 익양공(翼襄公) 이천(李瀳)의 아들로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하였다.

 

이충로(李忠老): 익양공(翼襄公) 이천(李瀳)의 둘째 아들로 일명(-名) 순로(順老)라고도 하며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이 신(李 愼): 세종 20년(143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하였다. 손자   이명(李蓂)이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게 되어 좌찬성(左 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시(孝 恃): 증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이온(李韞)의 둘째 아들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중석(李仲石): 통훈대부 원주 판판(通訓大夫原州判官)을 역임 하였다.

 

이의간(李義幹): 직장(直長)을 지내고 통훈대부 전생서주부(通勳大夫典生署主簿)를 역임하였다.

 

이성간(李成幹): 세상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워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도모하는 지사(志士)들이 가담할 것을 권  하였으나 "신하(臣下)로서 군주(君主)를 정벌(征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반정이 끝  난 후에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그를 엄벌할 것을 주장하자 중종(中宗)은 이런 사람을 죄인으로 다스린다면 신하의 도리를 장려할 길이 없다하여, 그의 충절(忠節)을 높이 치하하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삼았  다.

 

이 언(李 堰): 어모장군(禦侮將軍), 가선대부 판남원부사(嘉善大夫判南原府使). 전주 부윤(全州府尹), 중추원 부사(中樞院府使)를 역임하였다. 목민관(牧民官)때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世祖)의 칭찬을 받았으며 중추원부사로 있을 때는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 은(李 垠):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이 영(李 英): 1482~? 자(字) 사호(士豪)이며 이필간(李弼幹)의 맏아들이다. 중종 2년(1507)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급제(及第)하여 명유(名儒)들과 교분(交分)이 두터웠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두 아우(荃,薰)와 더불어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였다.

 

이 전(李 荃): 1486~1529 자(字) 무선(茂先) 호(號) 근재(近齋)로 총명한 자질에 학문을 좋아하여 경학(經學)에 밝았으며 출세에 뜻이 없어 성리학(性理學)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정암 조광조(靜庵:趙光祖)선생과 친교(親交)가 두터웠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혹상을 보고, 어지러운 세상을 탄식하며 안동(安東)으로 낙향(落鄕)하였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하여 대신들이 경연(經筵)에서 천거(薦擧)하여 중종 21년(1526)에 서부 참봉(西部參奉)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 훈(李 薰): 1489~1552 자(字) 형지(馨之)로 중종 29년(1534)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及第)하여 학자(學者)들과 친교(親交)가 두터웠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두 형(英,荃)과 함께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였다.

 

이 명(李 蓂): 1496~1572 자(字) 요서(堯瑞) 호(號) 동고(東皐)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중종20년 (1525) 사마시(司馬試) 급제(及第), 동23년(1528)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숭문원 권지(承文院權知),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홍주 목사(洪州牧使), 담양 부사(潭陽府使),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권신이기(權臣李芑)의 횡포를  탄핵(彈劾) 하였으며, 명종 4 년(1458)에는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동 6년(1550)에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동 8년(1552) 이조참판(吏曹 參判)에 임명되어 특진관 (特進官)으로 입시(入侍),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억울하게 옥사(獄事)를 당한 사람들의 신원(伸寃)을 제언하여 왕을 감동시켰으며,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 호조공조판서(戶曹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한 뒤 동 19년(1563)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되었다. 나이 70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고 왕이 궤장(几杖)을 특사(特賜)하고 동 21년(1565)에는 좌의정 (左議政)으로 승진 되었다. 선조 즉위년(1567) 경연(經筵)에서 새조정의 급선무를 진언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신원(伸寃)의 특전이 내려졌다. 노환(老患)으로 사퇴를 간청하였으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체임(遞任)시키고 왕이 전의(典醫)를 보내어 병을 다스리게 하였다. 동 3년(1569) 병석에서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간신(奸臣)들에게 내려 위훈삭파(偉勳削把)를 상소(上疏)하기도 하였다. 동 5년(1571) 향년 77세로 서거하니 왕이 매우 슬퍼하시며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정간(貞簡)의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동 7년(1573) 대제학  김귀영(大提學 金貴榮)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춘추관 기사관 심충겸(春秋館 記事官 沈忠謙)이 글씨를 써서 묘하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묘갈, 석등과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이 예(李 藝):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역임하였다.

 

이극순(李克淳):감사(監司) 이은(李垠)의 아들로 문과(文科) 급제 (及第)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이극해(李克諧):성균 진사(成均進士)에 급제(及第)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 축산포 만호(丑山浦萬戶)를 역임하였다.

 

이응로(李應老):좌의정(左議政) 이명(李蓂)의 아들로  통정대부 목사(通政大夫牧使)를 역임하였다.

 

이숙인(李液仁): 1510-? 자(字) 극인(克仁) 호(號) 대은(大隱) 중종 29년(153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급제(進士及第)하고 집현전 참봉(集賢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은 선비가 취할 바가 아니라하여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과 덕행을 쌓아 사람들이 정인(正人)이라 일컬었다.

 

이성호(李成虎) 증 통정대부 참의(贈 通政大夫參議)를  받았다.

 

이유인(李惟仁): 1522~1576  자(字) 원중(原仲), 음사로 봉열대부(奉列大夫)를 거쳐 중직대부 행현풍 현감(中直大夫行 玄風縣監),대구진관(大邱鎭管) 병마절제도위 감목관(兵馬節制都尉監牧官)를 역임하였다.

 

이흥연(李洪仁): 1525~1594 자(宇) 경회(慶會) 호(號)  풍은(豐隱)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효성과 지략과 무예에 출중하여 출사(出仕)를 권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 34년(1539) 임권(任權)이 명나라 동지사(冬至使)로 갈 때 데려가 일을 의논했다. 그 후 임권(任權)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여 집을 지어 주려 하니 형님도 집을 마련하지 못하였는데 감히 동생이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사양하였다. 임관찰사는 가상히 여겨 형제의 집을 똑같이 지어주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그의 집이 충효당(忠孝堂)으로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이 되어 안동(安東) 구담(九潭) 지구에서 싸우다가 선조 27년(1593) 장열히 순사(殉死)하였다. 그 후 순조 11년(1810) 나라에서 공의 충성심을 표창하여 정충각(旌忠闇)을 세웠다.

 

이대인(李大仁): 자(字) 경시(景施)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이  공(李 珙): 1533~1612 자(字) 공보(共甫),호(號)  율원(粟園)으로 명종 22년(1566) 사마시(司馬試)에 생원 급제(生員及第)하고 선조 6년(1572)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영일, 현풍 예안 현감(縣監), 경상, 평안, 강원 도사(都事)와 병조, 예조좌랑(佐郎)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등 여러 관직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잠시 청도 교수(淸道敎授)를 지냈을 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군마, 군량(軍馬,軍糧)을 공급하여 의병활동을 도운 공로로 1997년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봉안(奉安)되었다. 문집으로는 율원집(栗園集)이 남아 있다.

 

이  호(李 瑚): 1533~? 자(字) 여기(汝器) 호(號) 곡강(曲江)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학행이 독실하고, 문장(文章)은 웅혼전증(雄渾典重)하여 수식(修飾)에 얽매지 아니하였고 필법에는 힘이있어 다른 사람이 본받았다. 마을 앞에 곡강정(曲江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그곳에서 자연의 풍류를 읊었다.

 

이  옹(李 雍): 1534~? 자(字) 응요(應堯)로 명종 19년 (1563) 사마시(司馬試) 진사 급제(進士及第)하고 선조 3년   (1569) 문과(文科) 알성시(謁聖試)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종부시 정겸 춘추관 편수관 (宗薄寺正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다.

 

이  진(李 珎): 1555~1628 자(字) 옥이(玉尒) 호(號) 시은당(市隱堂)이다. 임진왜란때 화왕산(火旺山)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사재를 털어 의병활동을 도와 원종훈(原從勳)에 녹선(錄選)되었고, 통훈대부 행군자감 주부(通訓大夫行軍資監主簿)에 제수 되었다. 유고(遺稿)로 시은당문집(市隱堂文集)이 있고 임난공훈으로 1977년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봉안되었다.

 

이  회(李  회) 효종때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전남수사(全南水使)를 지내고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삼(李 參): ~1637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으로 인조 15년(1637)병자호란(丙子胡亂)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절사(節死)하였으며 효종 3년(1651)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이행민(李行敏): 영조(英祖)때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심기(李審幾): 종부시정(宗溥寺正) 이옹(李雍)의 아들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이경용(李慶龍): 자(字) 몽유(夢有) 호(號) 일암(日庵)으로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인조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가 되고,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이경정(李慶禎): 광해군 7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관직(官職)이 부사(府使)에 올랐다.

 

이진행(李震行): 1586~1642 자(字) 자수(子脩) 호(號) 서봉으로 광해군 원년(160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이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사직령(社稷令)으로 사주(社主)를 강화도에 무사히  호송한 공으로 현령(縣令)에 서임(敍任)되었다.

 

이현직(李賢直): 가평입향조(加平入鄕祖)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마전군수(麻田郡守)를 하였다.

 

이성민(李聲敏): 음사(蔭仕)로 벼슬이 조봉대부(朝奉大夫)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이르렀다.

 

이영길(李榮吉):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 경(李  璥): 통덕랑(通德郎) 이덕원(李德元)의 아들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 담(李 담): 자(字) 중훈(仲薰)으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가선대부 병사(嘉善大夫 兵使)를 역임하였다.

 

이유장(李惟樟): 1625~1701 자(字) 하경(廈卿) 호(號) 고산(孤山) 또는 사익당(四益堂)이다. 현종 원년(165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 급제(生員及第)하고 숙종 15년 (1688)에 그의 뛰어난 학문과 행실을 대신들이 천거하여 와서별제(瓦署別提), 공조좌랑(工曹佐郎), 안음현감(安陰縣監)등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이 제수되어 부임한지 7일만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송파나루를 지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國恥)를 읊은 『과송파(過松坡)』 시(詩)는 과거의 과제(科題)가 되기도 하였다.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탐구(探究)하여 주자(朱子)의 예론(禮論)과 퇴계(退溪)의 설(說)을 절충한 독자적(獨自的)인 이론(理論)을 정립하였다.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曺判書兼知義禁府事),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세자좌부빈객(世子 左副賓客)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저서(著書)로는 춘추집주(春秋集註), 동사절요(東史節要), 이선생예설(二先生禮說)이 있으며 고산선생문집(孤山先生文集) 6책이 남아 있다.

 

이 전(李琠): 1630~1714 자(字) 대재(大哉)이며 통덕랑(通攄郎) 이여주(李汝柱)의 장남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성일(李星逸): 1633-1709  자(字) 명거(明擧) 호(號)  오헌(梧軒)으로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으며, 향내(鄕內)에 강당을 지어 오헌(梧軒)이란 편액을 달고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유림의 존경을 받았다. 안동시 와룡면 마암사에 배향되었다.

 

이 치(李 埴): 1638~1711 자(字) 기지(器之)로 효행 (孝行)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었으며 행실이 독실하여 영조 23년(1746)에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판(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만기(李萬祺): 1666~1747 자(字) 덕보(德輔)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우춘(李遇春): 1673~1748 자(字) 자윤(子潤) 호(號) 농와(聾窩)로 숙종 40년(1713) 사마시(司馬試)에 진사 급제(進士及第)하고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무신난(戊申亂)때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쳐서 공을 세웠다.

 

이 간(李 柬): 1677~1727 자(字) 공거(公擧) 호(號)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으로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속종 36년(1709)에 사림학자(士林學者)를 등용(燈用)할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시강원 자의 (侍講院諮議),회덕 현감(懷德縣監) 경연관(經筵官) 충청도 도사 겸 해운관(忠淸道都事兼海運官)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를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보다 학자(學者)로서 명망(名望)이 높았으며 조선조 후기의 도학연원(道學淵源)관계에서 보면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의 제자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이며,율곡(栗谷)-사계(沙溪)-우암(尤菴)-수암(遂菴)-외암(巍巖)으로 이어지는 기호사림(畿湖士林)의 중심계열 학자(中心系列學者)이다. 수암(遂菴)의 같은 문하생(門下生)인 남당(南塘:韓元震)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과 대립적(對立的)인 외암(巍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으로 시작된 논쟁(論爭)은 두사람을 동조(同調)하는 학자들의 호락논쟁(湖洛論爭)으로 파급(波及)되어 한국성리학(韓國性理學)의 보편 논쟁(普遍論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조3년(1726) 50세에 생을 마치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추증(追贈)되고 문정 (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저서(著書)로는 외암집(巍巖集) 성리서(性理書)인 미발변(未發辨)이 남아 있고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강당골 문천사(文泉祠)에 배향되어 있다.

 

이민정(李敏政):1698-1775 자(字) 존중(存仲) 호(號)  옥봉(玉峯)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曹  參判兼 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민적(李敏迪):1702-1763 자(字) 혜중(惠仲)으로 호(號) 만포(晩圃)이다. 영조 20년(1743) 사마시(司馬試)에 진사  급제(進士及第) 하였다. 체화정(棣華亭)을 짓어 형(兄) 민정(敏政)과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이상진(李象辰):1710~1774 자(字) 약천(若天) 하지(下技) 또는 근사재(近思齋)로 영조 32년(1755) 사마시(司馬試)에 생원 급제(生員及第)하였으며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을 기울였다. 문집으로 하지집(下枝集)이 있다.

 

이 택(孝 澤):1716~1763 자(字) 계원(季源)이며, 영조16년(1739)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통정대부 행해미현감 겸 영장(通政大夫行海美縣監兼營將),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등을 역임하였다.

 

이한오(李漢伍): 1719~1793 자(字) 효승(孝承) 호(號) 용늘재(傭訥齋)이다. 지극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순조12년  (1811) 나라에서 정효각(旌孝閣)을 그의 8대조 홍인(洪仁)의 정충각(旌忠閣) 옆에 나란히 세웠다.

 

이우현(李禹鉉): 1738-1799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정조 8년(1783) 서산 현감(瑞山縣監), 김해 부사(金海府使),  황해도 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 제주 목사(濟州牧使)와 병사(兵使)를 역임하였다.

 

이철휴(李喆休): 1741-1794 자(字) 경보(敬保) 호(號) 추은재(楸隱齋)이다. 학문과 효행이 탁월하여 순조 17년 (1816)에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로 추증(追贈)되고 정려 표창(旌閭表彰)을 받았으며, 배(配) 광산김씨(光山金氏)도 순열(殉烈)로 정려 표창(旌閭 表彰)을받았다.

 

이정국(李楨國): 1743~1807 자(字) 목지(牧之) 호(號) 우원(尤園)이다. 영조 41년(1764)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급제(生員及第)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우원집 (尤園集)이 있다.

 

이경유(李敬裕): 1747~1807 자(字) 의협(義夾) 호(號) 양고(陽皐)이다. 영조 50년(1773)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 구례 현감(求禮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 持平), 어모장군 용양위 부사직(御侮將軍龍驤衛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이진국(李鎭國): 1752~? 자(字) 재경(載卿)이며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어영장(御營將)을 역임하였다.

 

이 환(孝 換): 1765~1826 자 (字) 원휘(元煇)이며 순조  5년(1804)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략장군 행오위도총부 도사,통정대부 행박천군수(通政大夫行博川郡守),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 겸 오위장(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경주 진영장(慶州鎭營將),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衡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이정보(李楨輔): 1766~1845 자(字) 익부(翼夫) 호(號)  한송재(寒松齋)이다. 경사(經吏)에 통달(通達)하였으며  순조 7년(1806) 경상 감사(慶尙監事) 윤광안(尹光顔)이  도내(道內)의 학덕(學德)있는 선비들을 모아 향음예(鄕飮禮)를 행할 때 공을 특히 우대하여 글을 읽게하고 경의(經義)를 함께 논했으며 관선당(觀善堂)의 기문(記文)을  짓게하여 걸었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청빈(淸貧)하며 세속(世俗)에 초연(超然)하여 사림(士林)이 모두 공경(恭敬)하였다.

 

이근문(李根文): 1794~1843 자(字) 성문(聖文)이다. 이환(李煥)의 아들로 순조31년(1830)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이조현(李朝鉉): 초명(初名) 시현(時鉉) 1816년생 헌종4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제주판관(濟州判官)을 거쳐 벼슬이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에 이르렀다. 왕조실록(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록(記錄)이 있으며 무보(武譜)에 등재(登載)되었다.

 

이구순(李龜淳):1850~1912 자(字) 낙서(洛瑞)이며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오위도총부 도사(五衛都摠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이희중(李希重): 고종 14년(1876)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선략장군 행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 行龍驤衛副司果) 통정대부(通政大夫)틀 역임하였다.